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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L의 운동화』 運動化
고작 20페이지에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운동화’라는 키워드만으로 이 소설이 청소년 소설의 결을 띌 거라 예측하고 있었다. ‘관장’이 체육관이 아닌 미술관의 관장이라는 걸 알아채고, ‘그’의 이니셜 첫 글자가 ‘L'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 모든 예상이 직선으로 힘차게 그어져 꿰뚫렸다. 나머지 내용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아 중간중간을 먼저 읽어버렸다. 결말은 읽지 않은 채 다시 페이지를 펼쳤다. 21페이지. 소설은 무너진 마음조차 복구해버린다.
『L의 운동화』는 역사-시대적인 상징, 의미를 지닌 운동화 한 짝의 복원을 맡게 된 ‘나’의 이야기이다. 약 28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살아낸 운동화는 신발 밑창이 죄 부스러졌을 정도로 노후했다. 복원사인 화자는 운동화의 의미와 역사를 아는 입장으로서 운동화를 복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어떻게 복원하는 게 옳은 일인지, 복원의 의미와 본질이란 무엇인지와 같은 질문들로 내내 휘감겨 있다. ‘L’, 그리고 ‘운동화’, 그리고 ‘그녀’, ‘강 선배’, 메일을 보낸 사람, 화자의 강의를 듣는 대학생, 수많은 예술 작품들, 예술사들과 같은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가 운동화를 복원하게 된 화자를 중심으로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으며 그러한 비계 위에서 진행되는 메인플롯은 보다 명확한 질문을 끊임없이 내놓는다. 2부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화자의 운동화 복원 장면은 서술과 묘사가 무섭도록 철저한 나머지 일종의 ‘메디컬 드라마’처럼 느껴질 정도다. ‘소설’이라는 정체성을 가끔가끔 잊어버릴 정도로 모든 텍스트들은 명료하고, 사실적이며 우리의 과거였던 그 시절, 그 시대의 풍경을 정확하게 비춘다.
소설은 한 상징과 의미에 모든 것을 고정해두지 않고, 질문하는 화자를 따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스펙트럼의 흐름을 띈다. 운동화는 ‘화’를 묵음 처리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비극적이고 유의미한 시대의 상징으로서 오히려 ‘L’의 이름을, 존재를, 개인성을 집어삼켰다가 ‘죽은 토끼’로서 어떤 고아한 예술품으로 자리 잡았다가, 재창작이자 복원의 대상으로-중태의 환자이자 이미 죽은 사체로서 ‘수술대’ 위에 올랐다가 마침내 다시 ‘L의 운동화’로서 온전히 서게 된다. 복원은 박제일 수 있고 훼손일 수 있고 재창작일 수 있으며 누군가가 원하는 일일 수도, 원하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소설 안에선 화자의 선택만이 비춰질 뿐 어떤 정답지도 제공되지 않는다. 물음표는 운동화의 족적처럼 독자의 마음에 가만히 찍힌다. 차라리 책 중간중간에 질문 란이 삽입된 학습서처럼 느껴질 정도로 소설은 수많은 질문을 독자에게 들이민다. 독자는 자신만의 선택을 따라 움직이는 화자를 바라보며 개인적인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우리는 ‘나’인가, ‘그녀’인가, ‘강 선배’인가, ‘문’인가, ‘채 관장’인가? 예술과 복원의 윤리, 복원의 수칙, 자신만의 가치-윤리관, 시대성, 시대 속에서 복원이라는 행위가 갖는 의미, 또한 ‘L’에 대한 무수한 가정과 궁금증들... 소설은 과거의 한 조각을 현재에 던짐으로써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질문과 심상, 예술관과 죄책감, 연대와 희망 같은 것들을 한 번에 꿰는 데에 성공했다. 한 짝 밖에 남지 않은, 직접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의 운동화에게서 독자는 보다 명확하게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 현대사의 오랜 한恨이 되어버린 그 사람을 쫓아가며, 우리는 지척의-가장 근래의 한恨들을 떠올린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비극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어디를 보고 서야 하는지, 어떤 마음으로 지나가는 것들을 돌아봐야 하는지 소설은 이야기한다. 길쭉한 ‘운동화 수술 소설’을 통해서 말이다.
적정한 선을 지키려면 작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겠지.(93p.)
작가의 의도란 무엇일까? 사람의 유품, 시대의 유물이자 상징이 되어버린 이 운동화에도 그런 것이 서릴 수 있을까? 화자는 소설 안에서 분명히 답을 찾는다. 하지만 각자의 답은 모두 각자의 과업일 것이다. 소설은, 화자는 결국 운동화를 ‘이한열’이라는 개인의 물품이자 역사적인 유물, 예술품으로서 정체화 하면서도 ‘타이거 운동화’라는 이 운동화의 정체성이 집단-한 세대가 공통적으로 지녔던 신념과 시간, 시대의 공유물임을 인정하고 복원 작업에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현재’의 모습(부스러진 밑창과 같은)을 파괴하기도, ‘과거만의’ 모습을 유지하기도 한다. 이러한 물건들에서 작가의 의도를 찾을 수 있을까? 그것은 어쩌면 개인만의 의미화에 국한될 수 있지 않을까? 개개인의 서로 다른 의미 속에서 물건의 본질적인 의미와 가치가 훼손되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정답은 없지만 가장 포괄적이고 어려운 질문이 소설의 심장처럼 박혀 맥동한다.
L의 운동화가, L을 넘어서서는 안 된다.
L을 집어삼켜서는.(110p.)
L의 운동화는 그러나 L이 아니다. L의 운동화가 신화화되어서는 안 된다. L이 그의 유품인 운동화에 집어삼켜져서는.(145p.)
나는 과도한 신화화와 의미화의 과정에서 결국 그 인물 자체가 지워져버리는 상황에 대한 염려라는 생각을 했다. 홀로 28년을 더 살아낸 운동화와 그 시절 멈춰버린 L. 그 운동화가 ‘L의 운동화’라는 정체성으로서 과도한 해석과 상징을 가져버린다면 오히려 개인으로서 존재했던 L이라는 인물이 흐려지고 죽음만이 포장된 껍데기만 남아버리는 것을 염려한 대목이 아닐까. 다른 해석도 궁금하다.
“우리는 선택적 제거를 했어요.”(121p.)
박 교수는 ‘보존할 역사적 가치’를 기준으로 복원을 진행했다. 그것은 과연 옳은 일일까? 무언가를 복원, 보존하고 제거해야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고 했을 때, 우린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L의 운동화’에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을까? 이 또한 개인의 의미화와 해석에 의해 판연히 갈릴 수 있는 부분이 아닐까? 그 차이로 인해 대상이 오히려 훼손이라 할 수 있는 피해를 입을 수도 있지 않을까?
L의 운동화를 내 작업대까지 운송해 오는 데 필요한 물품들 중에, 가장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졌다는 생각이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다. 구급 침대 역할을 할 종이 상자보다 더 중요한 그 무엇인가가.
L의 운동화를 내 작업대로 가져오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그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140p.)
‘그 무엇’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운동화의 정체성, 확실하게 명명한 운동화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운동화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복원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 세월 속에 사체처럼 부스러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일부이자 보존되어 길이 남는 것이 당연한 시대의 유물. 그 사이에서 정답을 찾지 못한 화자가 느낀 공허, 미흡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설 때마다 나는 냄새를 극복하기 위해 애쓴다.(160p.)
그럼 이 ‘냄새’는 또 무엇이었을까? 화자는 운동화를 작업실로 가져온 이후 알 수 없는 썩은내에 시달린다. 그러나 복원이 진행되는 중 그 냄새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버리고, 무사히 복원된 신발만이 작업대에 남게 된다. 나는 이것이 개인의 소지품이었던 신발의 의미화 과정에서 진행된 소설적인 환취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개인의 소지품, 주인과 함께 산화하여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어쩌면 세월 속에 주인도 모르게 분실되는 것이 당연했을 신발이 살해당한 주인을 잃은 이후 홀로 남아 28년을 살아 왔다. 화자는 그러한 ‘개인의 소지품’으로서의 신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었으나, 남들이 말해줬기에 아들의 신발로 인식한다는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의 말을 듣고서 이러한 부담을 내려놓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명명으로써 보존되는 정체성을 그 운동화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보고 명명하느냐, 사람들이, 시대가 그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지키기로 결심하느냐에 따라 대상의 정체성과 가치는 변화할 수 있다. 운동화는 신화화 되지 않되 개인의 유품이자 시대의 유물로서 다중의 정체성을 지니며 본 모습 일부를 되찾게 된다. 이는 부스러져가는 사체를 박제한 화자의 행동의 은유로도 해석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대상이 갖는 의미, 화자가 대상을 어떻게 의미화하게 되었는지를 표현하는 기법으로도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을 했다.
그 시절 L의 운동화와 똑같은 운동화가 몇 켤레나 만들어지고 팔려 나갔을까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L의 운동화를 신고 다녔을까요?
그 운동화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갔을까요?(216-217p,)
작중 화자는 신발의 밑창 패턴을 알아내기 위해 L의 운동화와 같은 제품을 수소문하지만 어디서도 그 무엇도 찾지 못한다. 한때 유행이기까지 했던 운동화는 세월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 구절에서 ‘운동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지 질문하고 싶다. 한 세대가 공유했던 시간, 기억, 신념과 같이 읊어지는 운동화는 지금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운동화와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았을까? 연대하고 행동하던 이들의 의지 같은 것들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노쇠하고 패퇴하여 사라지지 않았음은 소설 전반의 배경 묘사에서도 드러난다. 사람이 가득 채우는 서울 광장의 모습이 그것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죽음은 신발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은 작중 “기억은 신발에서 시작된다.”라는 말로 변형된다. 이것은 각기 다른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에서 역사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로 해석되는데, 이런 면에서 보면 위 구절은 우리가 무심코 잊어버린 개인의 정체성과 공유해온 가치관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소설은 서울 광장,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와 같은 플롯으로 서로의 말을 반박하고, 보완하고 첨언하기도 한다. 끝없는 질문 속에서, 신화와 개인을 넘나드는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운동화 복원 작업은 지속되고 어느새 화자는 운동화의 치수까지 알아낸다.
270. 채 관장조차 알지 못했던 ‘L’의 한 면이 고개를 드러내고 이쯤에서 소설은, 화자는 모든 답을 내린 이후다. 위에서 말한 복합적인 정체성이 그것이다. L을 집어삼키지 않되, 여전히 ‘L의 운동화’로서 세상에 남게 된 운동화는 ‘여대생’이 어떻게 렘프란트의 자화상을 102장이나 모사할 수 있었는지 깨닫게 한다. 볼 때마다, 보는 사람마다, 보는 시간과 시대마다 미묘하게 다른 모습과 의미를 지닌 운동화. 특히나 단일한 답을 단정 짓고 선악과 같은 이분법적 가치판단, 단순한 흑백논리로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것이 시대정신이 되어버린 2020년대에 더더욱 세밀하고 교묘한 회색의 스펙트럼을 밝혀주는 소설이 아닐까 생각했다.
‘L'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께서 별세하셨다는 뉴스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년 하고도 반년에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었음이 실감이 나지 않는다. 소설을 쓴다면 이런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아주 빠른 소설을 읽었다. 균형적이고 안정적인 플롯과 정확하고 차분한 온갖 묘사 서술들. 고작 두 시간 동안 감히 너무 많은 것을 배우게 된 소설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 자체로 시대적 의미와 가치를 모두 내포하는 소설이라고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