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검색
본문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고쿠분 고이치로 지음 / 최재혁 옮김
우리는 지루함과 어떻게 마주하고 살아야 할까?
인간은 풍요로워지기 위해 애써왔다. 그 결과, 우리는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행복할까? 정말로 여유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가? 사람들은 이 여유와 한가함을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알지 못한다. 그 틈새를 파고 든 자본주의는 소비와 향락을 부추기면서 이미 만들어진 즐거움에 사람들을 길들여버린다. 그러나 그것들이 진정한 삶의 즐거움이 될 수는 없기에 사람들은 결국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는 ‘지루함’의 정체에 대해 파고 든 책이다. 저자는 파스칼, 러셀, 니체, 칸트, 하이데거, 마르크스, 아렌트, 아도르노, 들뢰즈 등의 철학적 논리, 인류학, 고고학, 경제학, 소비사회론, 동물행동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글들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질문에 대답해나가고 있다. 특히 ‘지루함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 같은 지루함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을 모색한다.
풍요한 사회에서 왜 지루해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유와 한가함은 가능해졌지만 정작 사람들은 그것의 ‘활용법’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자본주의와 결합된 각종의 문화산업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온갖 즐거움을 제공한다. 과거에는 노동자의 노동력 착취가 문제였다면, 오늘날에는 오히려 노동자의 한가함이 착취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한가함의 착취’는 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거대한 힘이다. 왜 한가함은 착취되는 것일까? 인간이 지루한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제공된 즐거움과 쾌락에 몸을 맡기고 안도감을 얻는다. 그러나 이것이 지루함을 해결하지는 못한다.
왜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가?
저자는 소비하지만 제대로 된 사치는 부리지 못하는 현대인을 주목한다. 그리고 그 연원을 계급격차가 줄어 든 19세기 이후의 신분의 상징으로서의 소비현상에서 찾는다. 정착생활의 등장이후 나타난 사유재산과 계급 성립 시대의 유한계급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게끔 허락받은 사람이었다. 하층계급은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벅찼고 한가하거나 지루해할 틈이 없었다. 그러므로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힘의 상징이었다. 유한계급은 자신의 한가로움을 과시해 줄 고용인들을 우아하게 지루함을 견뎌내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19세기를 지나면서 유한계급이 몰락하고 계급 격차가 줄어들자 이제는 한눈에 보이는 신분의 상징이 중시되었다. 끊임없이 소비하지만 유한계급처럼 지루함을 견뎌내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한가하지만 지루해한다. 노동하고 남는 여유 시간은 휴가라는 이름의 노동이 되었다.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분을 전환할 만한 일을 찾지만, 그 일에도 지루함은 숨어 있다. 이렇게 지루함은 인간에게 근원적인 문제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자는 영화 〈파이트클럽〉을 예로 들어 지루함과 소외의 문제를 논한다. 소비사회에서의 소외는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형태로 작동한다. 그래서 소비자는 스스로를 막다른 곳으로 몰고 가고, 스스로를 좀먹는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멈출 것인가? 이 대목에서 하이데거의 논의를 참고할만하다. 하이데거는 지루함을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어떤 것에 의해 지루해지는’ 수동적인 지루함과 ‘어떤 상황에 처하여 그 곁에서 지루해지는’, 즉 상황적으로 자신을 뒤덮은 지루함이다. 전자의 경우는 지루하게 만드는 원인을 제거하면 되지만 문제는 후자의 경우이다. 저자는 이 대목에서 특정한 대상에 ‘압도되어 있는 상태’를 계속하는 것의 중요성을 부각한다.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라는 존재를 마주하면서 새로운 발견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이고, 지루함이라는 짙은 안개도 걷힐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말한다. “인간은 지루해한다. 아니, 지루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유롭다.”
예술창작기초학부 한수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