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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같이 세상 끝으로 가지 않을래? - 『엄청나게 시끄러운 폴레케 이야기 HET IS FIJN OM ER TE ZIJN』
네덜란드 책은 우리 아동문학 시장에 흔치 않다. 휘스 카이어라는 작가 이름도 당연히 낯설다. 사실은, 전에 이 작품에 대해 누군가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그때는 별 관심이 없어서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번에 다른 누가 또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에 작가로서의 의무감 같은 게 건드려져 일부러 구해서 읽고 기억하고 싶은 책 목록에 고민 없이 추가했다. 제목 뿐 아니라 소제목 전부가 길고 설명적인 게 이 책의 눈에 보이는 특징이다. 짧은 제목은 스물다섯 자, 긴 제목은 자그마치 마흔여덟 글자나 된다.
무슨 전략인가 싶었다. 소제목이랄 것도 없이 숫자만 달랑 적고 정보 제공에 시치미 떼는 작가는 봤어도 이토록 장황하게 감정을 풀어놓는 경우는 처음이라 초보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작가 약력을 보니 휘스 카이어는 1942년 생 초등학교 교사다. 출간한 책 목록도 단출하여 우리한테까지 온 경위가 낯선 작품에 대한 편집자의 호기심 차원인 줄 섣부른 착각을 했다.
네덜란드 황금연필상. 독일 아동청소년 문학상. 룩스 상 수상.
휘스 카이어에게 붙은 수상 경력이다. 이러한 찬사를 확인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단한 능청과 문제를 바라보는 여유. 길게 붙인 소제목은 나의 섣부른 짐작과 달리 너무나 유연한 어른의 다정한 시각을 담아내고 있었다. 작가가 이 작업을 얼마나 즐겼는지를 곳곳에서 확인할 만한 능청이 독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니 가히 고수가 아닐 수 없다.
자기 영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관대함과 관찰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다. 우리 작가에 의한 책이라면 과연 용납이 됐을까. 여기서 다루어지고 있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부모의 이혼과 헤어진 상태에서의 자유로운 연애 방식도 낯선데 엄마의 새 남자는 주인공이 담임이기까지 하다. ‘담임이 엄마와 사랑에 빠졌다!’ 로 시작되는 아동문학 작품이라니. 작가는 화자의 입을 빌려 시니컬하게 네덜란드의 요즘 아빠들을 꼬집는다.
아빠가 아닌 사람이 아빠이거나,
아빠는 아빠인데 다른 집에 살거나,
아빠가 있기는 하지만 어디 사는지 모르거나,
시험관 아빠라 누가 우리 아빠인지 모르거나, 시험관 아빠가 누구인지 알지만, 엄마의 남편을 아빠라고 불러야 해서 시험관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거나,
시험관 아빠가 엄마의 남편은 아니지만 시험관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거나,
아빠가 누구고 어디 사는지 알지만 찾아가면 안 된다거나,
아빠가 남자를 좋아해서 졸지에 아빠만 둘이라거나,
엄마가 레즈비언이라 여자 아빠만 둘인 경우.
이 장황한 묘사에서는 웃음이 터지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지만 이게 어디 네덜란드만의 상황이겠나. 일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건만 아직 우리는 이 정도로 비아냥대기를 속 시원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전히 ‘어린이에게 끼칠 영향이라든가, 어린이 보호 차원의 아동문학의 역할’이라는 잣대가 매겨지고 있단 말이다.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소지가 농후한 작품들에 애초에 족쇄를 채우려 했던 시도는 비아트릭스 포터의 ‘피터 래빗’에서부터 있었으나 피터 래빗이 아이를 망쳤다는 보고는 없으니 어른의 기준이라는 게 때로는 얼마나 고리타분한지.
주인공 폴레케가 사랑하는 남자친구 미문을 통해서는 네덜란드가 받아들인 이민 정책이라든가 미문이 속한 모로코 문화의 정략결혼이 에둘러 드러나고,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어도 종교나 전통적인 가치관에 매여 사랑의 감정마저 억압당하는 아이들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인종마다 다른 문화. 인종 차별. 종교. 마약. 성 문화. 붕괴된 가족 등 복잡하고 심각한 문제들을 건드리면서도 주인공 폴레케를 중심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풀어낸 이 작품은 ‘시를 쓰고 싶은 아이와 시인이 되고 싶었던 아빠’를 섬세하게 스케치하며 문학성 또한 놓치지 않았다.
부모의 종교관이 어떤 아이들에게는 버거울 수 있다. 부모의 종교를 거부하는 순간 죄의식에 빠질 위험이 큰데 바로 이 경우가 그렇다. 부모의 종교관이 자식을 옭아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부모는 드물다. 감히 대들기 어려웠던 어린 소년은 답을 알기 어려웠던 집안의 분위기로부터 도망치는 대안으로써 ‘멋진 시인이 되는 것’이라는 허울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냈고 자기만의 게토로 웅크려들었다.
시를 쓸 수 있는 것과 시인이 되고 싶은 감상은 결이 다른 문제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도 그저 시인이 되고자 했던 몽상가는 가정도 딸도 지키지 못했다. 사회 부적응자로 길거리 인생이 되어 약에 의존해서 다만 ‘시를 한 편 쓸 것 같다’는 허약한 소리나 할 뿐이다. 그런 아빠를 지키고자 폴레케는 노숙자들 틈에서 아빠를 찾으려 하고, 아빠가 시를 쓸 거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하고, 조부모도 어쩌지 못하는 아빠를 위해 기도하고, 대신 도둑 누명을 써주고, 아빠에게 마약 치료를 권하고, 아빠의 치료 센터에 함께 입소하는 데에 방학을 투자한다.
폴레케는 아빠가 이혼하면서 ‘나랑 같이 세상 끝으로 가지 않을래?’하고 물었을 때 현명하게도 엄마랑 살기를 선택했고, 길거리의 아빠가 씻지 않고 약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도 기꺼이 포옹하며 이해하려고 애쓰고, 아빠가 시 한 편을 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폴레케가 바라는 아빠의 ‘시 쓰기’란 ‘이 세상에서 내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리나 하는 너무나도 유약한 아빠가 이 세상에 살아도 좋을 이유 하나일 뿐이다. 폴레케의 시 쓰기는 아빠를 포기할 수 없는 딸의 간절함이고 아빠가 없으면 쓸 이유도 없는 아슬아슬한 끈이다.
비록 자기 삶에 무책임한 아빠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폴레케는 벼랑 끝에 선 아빠를 구하고자 아빠랑 같이 세상 끝으로 가기를 스스로 선택할 줄 아는 야무진 아이다. 세상 끝에서 아빠를 데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삶의 중심으로.
멋진 작품이다. 농담하듯 힘을 빼고 제대로 한 방 먹이는 작가의 연륜이 놀랍다.
이 책을 읽고 네덜란드가 궁금해졌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작가에게는 이토록 풍요로운 자양분이 된다는 사실을 또 확인한다. 뒤틀린 듯 혼란스러운 중심에서 명철한 시각을 유지하는 휘스 카이어의 다른 작품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