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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라는 신세계 - 나무, 춤춘다

등록일 2020.11.16 / 작성자 김*은 / 조회수 103  

그림책이라는 신세계 - 나무, 춤춘다



교수 서평 / 김지은


55번째 볼로냐가 주목한 우리 그림책 - 『나무 춤춘다』(배유정 지음. 반달)


 


그림책 한 권의 길이가 15미터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이 그림책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넓은 공간이 필요하다. 가능하면 봄바람이 불고 산새들이 조용조용 노래하는 곳으로 나들이 나가서 읽는 것이 좋겠다. 나무의 일생을 다룬 병풍 형태의 그림책인데 책의 모양은 몇 백 년에서부터 길게는 천 년을 살아가기도 하는 나무들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처럼 세로로 길게 펼쳐진다. 이대로 끝나지 않는 걸까 싶을 즈음에 고목이 된 나무 둥치에서 푸른 돌고래 한 마리가 나와 하늘을 날며 나무의 춤은 끝난다. 배유정 작가의 그림책 『나무 춤춘다(반달)』에 대한 이야기다.


그림책은 어떤 한 사람이 일생동안 읽는 책이다. 동시에 어떤 한 사람의 일생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아직 혼자서 집 바깥으로 놀러 나가기 어려운 아기들은 그림책을 통해서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법, 아침과 밤, 마을과 숲, 사계절을 배운다. 학교와 놀이터에서 돌아온 어린이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림책에서 낮에 함께 놀던 친구의 얼굴을 다시 만난다. 엄마와 아빠의 일터와 고단한 하루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곳도 그림책이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가족을 만나고 가슴 아프게 헤어지는 모든 순간이 그림책 속에 있다.


2018년으로 55회를 맞은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이 어린이책을 이루는 비옥한 토양이라는 주제로 3 26일부터 28일까지 사흘간 열린다. 『나무 춤춘다』는 이번 볼로냐도서전에서 그림책의 새로운 흐름을 이끄는 지역의 작가들에게 수여하는 뉴 호라이즌 부문 라가치상 대상을 수상했다. 2009년 주빈국으로 참여하여 세계 그림책 무대에 한국 그림책의 저력을 인상 깊게 드러낸 이후 볼로냐도서전에서 우리 그림책 작가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우리가 기획하고 창작하고 출판한 그림책들이 라가치상 대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다양한 부문의 우수 작품으로 꾸준히 수상작에 올랐다. 이번 도서전에서도 대상 수상작 『나무 춤춘다』를 비롯하여 신인작가에게 수여하는 오페라 프리마 부문에서 안효림 작가의 『너는 누굴까(반달), 예술과 건축 부문에서 정진호 작가의 『벽(비룡소)』이 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라가치상을 받게 되었다. 올해는 중국이 주빈국으로 나서는 해이기 때문에 그동안 주로 영미권 그림책이 주류를 이루었던 볼로냐도서전 전시장에 새로운 열기가 가득할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 그림책이 세 권이나 수상작을 위해 마련된 무대에서 주목받게 되면서 부쩍 성장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그림책들에 대한 관심도 더욱 높아질 것이다.


『나무 춤춘다』는 읽는 동안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작품이다. 가만히 책을 펼쳐보고 있으면 숲속 길을 걷다가 잘 아는 한 그루 나무를 만난 것처럼 편안하다. 접힌 면으로 이어지는 나무 둥치 이미지의 선명하고 독특한 색감과 선은 뚜렷하지만 글 텍스트는 간결하고 담담하다. 독자는 울렁거릴 정도로 격렬한 그림의 감동 속에서도 점점 더 고요하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게 된다. 15미터에 이르도록 책장을 펼치고 또 펼치는 동안 하늘 끝까지 닿을 것 같은 고목의 가지를 올려다보면서 가만히 멈추어 생각에 잠기는 기분을 느낀다.


이 책을 강의에서 보여주기 위해 학교에 가져와서 학생들과 광덕산 아래 다동 옆 긴 계단에 펼쳐 두고 나란히 서서 같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등 뒤로 숲이 있고 그 아래로 이 그림책을 펼쳐 놓았더니 계단 저 아래까지 흘러가듯이 책이 놓였다. 수업을 듣는 수십 명의 학생들은 시냇물을 따라 걷는 것처럼 그림책 곁을 따라 내려가며 가다가 서다가 하며 책을 읽었다. ‘나무는 흐른다’, ‘나무는 만난다’, ‘나무는 채운다’, ‘나무는 품는다는 짤막한 문장들이 나무 곁에 또박또박 적혀 있다. 마블링 된 것처럼 화려한 색과 무늬 사이를 잘 들여다보면 그 안에 개구리와 두꺼비가 있고 풀벌레가, 나비가, 피고 지는 꽃과 열매가, 나무가 겪고 만들어낸 것들이 다 담겨 있다. 학생들은 이 책을 계단에 펼쳐두고 읽은 길지 않은 시간을 두고두고 잊기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한 폭의 명상의 시간이었다.


2018년 볼로냐 도서전에서 한국출판문화협회가 마련한 한국관의 특별전 주제는 일상의 아름다움이었다. 어린이 독자들에게 일상의 아름다움을 관찰하는 일은 세계의 의미를 배우고 발견하는 기본적인 토양(Fertile ground)이 된다. 성인 독자들은 그림책이 보여주는 구체적인 순간과 마주하면서 잊고 지냈던 삶의 의미를 다시 발견할 수 있다. 『나무 춤춘다』에서 나무는 평범해 보이지만 자신만의 뜻 깊은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비유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들 각자의 삶은 각별하다. 그림책은 이렇게 작가만의 독창적인 시선으로 이름 없는 누군가의 하루를 조명하고 응원한다. 그 안에서 발견되는 간결하며 정직한 아름다움은 우리들에게 하루의 소중함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놓치기 쉬운 장면들 속의 숨은 이미지들은 우리가 얼마나 거대한 구조 속에 촘촘히 연결된 복잡한 삶을 살아가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독자는 깊이 패인 나무 옹이들과 잘린 면에 드러난 나이테를 보면서 나무는 어떤 부당한 풍파를 겪으면서 버텨 온 것인지, 저 나무를 일으키기도 하고 부러뜨리기도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에 잠기게 된다. 날 수 없는, 뿌리가 깊게 박힌 나무의 조건을 뛰어넘는 나무는 난다와 더불어 이 그림책의 마지막에 여운처럼 남는 마음은 아마도 나무 꿈꾼다일 것이다.


한 권의 걸작 그림책은 우리 삶의 아주 사소한 모습을 그 밑바닥 넓은 지평까지 보여준다. 『나무 춤춘다』도 그러한 그림책으로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그림책의 역사에 남게 될 것이다. 숲으로 나갈 일이 있다면 이 책과 함께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 보기를 권한다.



그림책이라는 신세계 - 나무, 춤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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