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본문

불명료함에 반대하며

등록일 2020.11.15 / 작성자 정*준 / 조회수 161  

불명료함에 반대하며 

고통에 반대하며 / 프리모레비


불명료함에 반대하며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읽고 당황했다. 기대와 너무 달랐던 것이다. 예상을 빗겨가는 책이었다. 나는 읽기로 마음먹은 책에 대해 정보 없이 읽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오해가 있으면 있는 대로, 편견이 있으면 있는 대로, 읽는 것이 좀 더 정확하게 책을 읽는 한 방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홍보하는 띠지나 간략한 설명이 앞뒤로 붙어 있는 겉표지도 벗겨버린다. 그래서 때론 다 읽은 후 작가의 기본 프로필을 몰라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이번에도 그랬다. 아무 정보 없이 검색도 하지 않고 책을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기 전 갖고 있던 예상은 두 개였다. 하나는 고통에 집중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고통에 관한 짧은 글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고통과 무관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다. 둘째는 글의 톤과 분위기가 무겁고 진지하여 치열한 독서가 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그것도 아니었다. 이 책은 재치와 유머와 여유가 넘치는 책이었다. 그러니까 이 책은 고통에 반대하며라는 제목의 산문이 실려 있는 프리모레비의 산문집이다. 그렇다면 그가 쓴 산문의 주제는 한 마디로 말하면 고통인가? 그것도 아니다. 설명하기 어렵다. 주제가 너무 다양하고 다채로워 하나로 요약하기가 힘들다.

 

 이탈로 칼비노는 그를 백과사전 맥을 지닌 작가로 정의 했다. 맞는 말이다. 읽어보면 알 것이다. 나 역시 이번에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동안 나는 프리모레비의 일면만을 알고 있던 셈이다. 다시 봤다. 그는 다양한 주제를 핍진하게 탐구하는 흥미로운 작가였다. 특히 재미있는 지점은 동물에 관한 글이었다. 그는 동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다람쥐, 나비, 딱정벌레, 거미, 귀뚜라미, 벼룩 같은 일반적인 의미의 동물뿐 아니라 켄타우로스 키메라 같은 신화적 동물들도 다루고 있다. 사실과 정보를 한 손에 놓고 작가적 해석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그것에 접근하고 있었다. 그는 괴짜처럼 엉뚱했고 때론 아이들처럼 장난스러웠다.

 

 그는 화학자로서 융합의 꿈을 꾼 작가였다. 과학적 정신과 문학적 창조성의 만남을 꾀하였고 그것을 글쓰기의 중요한 요소로 삼고 동시에 독자들과 다른 작가들로 하여금 그래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전도하고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그 전도에 어느 정도 넘어가고 말았다. 나는 여러 글들 중에서 특히불명료한 글쓰기에 대하여라는 글에 감명을 받았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생각해볼만한 주장이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반성하게 만들었다. 우선 그는 자신이 전직화학자로서 현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과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물질을 꿰뚫어보고 구성과 구조를 알고자 하며 속성과 행동양식을 예견하는 습성이 있는데, 이는 통찰, 구체화와 간결화의 정신적 습관, 사물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려는 항구적인 욕망으로 이끌어준다. 또 화학은 분리하고 측량하고 분류하는 기술인데, 이 세 가지는 사건을 묘사하거나 상상을 구체화하려는 사람에게 유용한 훈련이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거칠게 말하면 프리모레비는 이과적인 작가다. 그는 세계를 바라보는 방법과 그것을 이해하고 감각하는 모든 면에서 분명한 논리와 정확한 이해에 도달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로운 글쓰기라고 믿었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한 지점을 언어로 표현하지 않고 불분명하게 쓴 글에 반대했다. 느낌적인 느낌. 그런 게 있다, 라고 누가 말할 때 그는 답한다. 그것은 느낌의 차원에서 받아들일 문제고 그것을 글로 쓸 땐 분명하게 써라, 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프리모레비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일한 진짜 글쓰기는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 진정 위에서 언급한 의식의 모든 개개 구성요소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유서 깊은 견해는 내면에서 말하는마음은 이성의 기관과 다르고 좀 더 고귀한 기관이며, 마음의 언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는 가정에 근거한다. 마음의 언어는 시간적·공간적으로 보편적이기는커녕, 변덕스럽고 오염되었으며 유행만큼이나 급변할뿐더러, 사실 유행의 일부이다.”  

 

 나 역시 좋은 글의 기본 원칙은 정확한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모호함이라는 문학의 유령은 사실 진정한 문학성을 가리는 그늘이라 믿는다. 모호함. 그것은 인격이 없고 의미도 없다. 우리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수식. 이를테면, ‘시적이다’ ‘어렵다’ ‘문학적이다’ ‘관념적이다’ ‘복잡하다등등의 표현은 혹자에게 어렵고 때론 모호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나름의 이유와 명분을 갖는다. 잘 쓴 물리학 논문은 분명 잘 써졌지만 나 같은 사람에게는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할 수도 없다 하더라도 관념적인 문장은 분명 그 안에 관념과 사고의 비밀을 품고 있다. 복잡한 것도 복잡한 방식으로 정확할 수 있다. 하지만 모호하다는 것은 다르다. 그것은 아무 이유가 없기에 알 수 없는 어려움이다. 복잡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저 꼬여 있는 길이고 미로인 줄 알았는데 입구도 출구도 없는 문장이다. 아니, 문장이라고 할 수 조차 없다. 하지만 글을 쓰다보면 불명료함 뒤에 숨고 싶은 유혹을 자주 느낀다. 그것을 정확하게 지시할 단어를 찾는 것이 너무 힘들고 설명한 논리와 문장을 쓰는 것도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리모레비는 정색하며 말하고 있다. 불명료한 것은 문장이 아니라고. 때론 고통이나 울음 같은 봐주고 싶은 부분조차 불명료하다면 반대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 점이 좋았다. 부끄럽지만 시원했다.

 

 “많은 문명에서 통곡의 애도는 의례이며 관습이다. 하지만 통곡은 과도한 수단이다. 눈물로는 개인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나, 언어로 본다면 무력하고 투박할 따름이다. 정의상 언어라고 할수도 없지만 말이다. 무언의 감정표출은 명확한 언어적 표현이 아니며, 소음은 말소리가 아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형언할 수 없는 것, 실재하지 않는 것, 동물 울음소리 한계에서 울리는텍스트들을 찬사하는 것에 진저리가 난다.”

 

 아니. 신음하지 말라니. 소리를 내지도 말고 통곡하지도 말라니. 도대체 고통을 알기나 하는 자인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프리모레비라면 우리는 일단 수긍해야 한다. 그가 고통을 몰라서일까? 그가 통증을 알지 못하는 자이기 때문일까? 그래서 우는 것도 이해 못하고 신음에도 인색한 것일까? 아니다. 우리는 안다. 그는 그 어떤 누구보다 고통전문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쓰는 자들은 그것을 쉽게 표현할 울음소리나 신음 같은 것을 써서는 안 된다고 한다.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것을 문장으로 써야 한다면 표현할 방법과 단어와 분명한 논리를 찾으라고 말한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쓰지 말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것에 대해 잘 쓰라고 한다. 글에 있어서 그는 단호하다. 마음은 고급 언어가 아니며 모호함은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책임이 있다. 우리는 우리가 쓴 것에 대해 한 단어 한 단어 책임져야 하고, 모든 단어가 반드시 제 목표에 도달하도록 해야 한다.”

 

 책임이라는 단어. 요즘의 사회를 제 정신으로 사는 자들은, 제 정신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자들은 그 단어에 모종의 죄책감과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채무감도 갖고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많이 한다. 프리모레비의 글을 읽은 자들은 모두 각자의 삶의 터전과 방식으로 무거운 숙제를 떠안게 된다. 이것이 인간인가, 라는 질문과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로 가득한 이 세계에 대한 서늘한 인식. 그리고 고통에 반대하며 동시에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자문으로 마음은 진동하게 될 것이다. 우선 나는 고통에 반대하는 정확한 글쓰기를 실천하기로 노력하겠다. 수학자는 수학자의 언어로. 과학자는 과학자의 언어로. 시민은 시민의 행동으로서 행동하고 발언하기를 바란다.      

 

 프리모레비에게 빚진 게 많다. 덕분에 한 편의 소설을 썼고 지금은 글을 쓰는 자로서 바른 인식도 갖게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탐구할 때 그가 알려준 것에 도움을 받는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그의 도움을 받으라. 그는 도울 것이다. 불명료한 방식이 아닌 명료한 방식으로서.   

첨부파일 :
댓글 0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