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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누스 푸티카
어느 여름 옥상에서 어떤 감정을 알게 됐는데
떠난 사람의 길고, 축축한, 잠옷이
펄럭이는 걸 보았지
「베누스 푸티카」 중에서
시가 감정을 잘못 말하면 위험해진다. 주관적 감정을 해소하는 밀폐된 세계 안으로 작품이 갇힐 가능성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연히 문제는 말하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중요하다. 박연준의 시에서 감정은 시의 목소리가 도달하는 최종목적지가 아니다. 그녀의 시는 감정을 경유해서 어디론가 더 나아간다. 앞서 인용한 시의 목소리는 지금 어떤 감정을 알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박연준의 시는 감정 이상의 것을 알아버린 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것은 무언가가 어긋나 있다는 직관적 느낌일 수도 있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정으로 인해 자신이 처한 현재의 자리가 얼마나 문제적이고도 허술한지에 관한 앎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어떤 감정을 아는 일은 진정 위험하다. 그 감정에 떠밀려 인생이 예상밖의 곳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든 몰랐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삶의 비밀이 눈앞에 드러나는 경험은 꼭 유쾌하지만은 않을 것이나, 박연준의 시는 그 비밀을 보게 만듦으로써 삶을 다시 생각하고 다시 살게 하려는 욕망을 부추긴다. 생각해보면 문학작품에 우리가 거는 큰 기대중 하나는 나를 떠미는 강력한 힘과의 만남에 있지 않은가. 우리가 소위 감동이라 부르는 것 또한 저 힘의 기능에 대한 다른 표현일 것이다. 박연준의 시가 전하는 비밀중 하나는 삶의 공포에 관한 것이다. 박연준은 삶을 망치는 폭력이 얼마나 느닷없고 얼마나 가혹한지를 그린다. 시의 이미지를 빌어 말하면 삶은 나를 큰 보자기에 싸서 아무대나 버려놓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벌이고(「베누스 푸티카」), 또한 삶은 내 얼굴이 무엇인지 알아보기 힘들게도 한다(「녹」).
결국 저 폭력은 삶의 주인의 자리에 마땅히 참여하고 있어야 할 주체로서의 ‘나’를 지워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 망가진 삶의 기억을 들여놓으려 한다. 그리하여 모욕과 수치로 물든 삶에 붙들려 사는 사람을, 죽지도 않고 살지도 않는 그런 삶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망가진 삶이 나를 강력하게 붙들어 세우는 이 치욕의 쓰디쓴 감각에 대해서라면 우리는 박연준 이전에 이성복이나 최승자를 떠올려봄직도 하다. 이성복의 치욕의 영토를 낮은 포복으로 통과하며 상처를 늘 생생하고 아린 것으로 만들어 삶의 감각을 깨웠다면, 최승자는 치욕의 공간을 죽음의 색깔로 얼어붙게 만들어 그것을 거울삼아 기괴한 우리들의 몰골을 날카롭게 드러냈었다. 그렇다면 박연준은 그들과 비할만한 어떤 방법을 구사하고 있을까.
박연준 시의 밑바닥에는 모욕과 수치로 물든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큰 그림이 자리하고 있다. 벗어나려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분명 도망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시인은 애초부터 삶이란 도망갈 수 없는 무엇이라고 말한다. 가령, “버렸더니 살겠다/ 내가 나를 연기하며/(시도 쓰는 게 아니라 쓰는 연기를 하며)”(「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 된다」) 살 수는 있겠으나, 잘 살아지지 않더라고 고백한다. 도망칠 수 없는 삶으로부터 박연준 시인이 자신을 구하고 또한 시를 구하기 위해 발견한 방식은 술래를 자처하는 것이다. 이 술래는 슬픔을 찾는다. 슬픔만이 치욕과 대결할 생각을 빚고 슬픔만이 치욕의 자장 안에서 치욕이 될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술래는 슬픔을 포기하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술래가 슬픔보다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은 기다림의 시간이다. 많은 시들이 기다림의 시간을 빚는다. 시란 그렇게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거나, 누군가는 오지 않을 거라 믿는 것을 올 거라고 믿는 고집스러움 속에서만 발생하는 것일까. 박연준의 시에서 기다림은 때로는 실의를 빚기도하고 또 때로는 기다래지는 생각들을 생성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기다랗게 늘어나는 생각들로 어떤 믿음과 어떤 언어들은 새롭게 벼려진다.
삼각형은 동그랗다 이름이 웃는 것처럼
장미는 애꾸고 버드나무는 울지 않는다
손목은 기도하다 꺾이고 욕망은 가난하다
-「기다리는 자세」 중에서
삼각형이 동그랗다는 말에는 세상의 합의를 넘어서려는 의지가 작동하고 있으며 장미가 애꾸다라는 표현에는 고통으로 인해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기 힘들었던 시간의 시선이 새겨져 있다. 술래가 되어 기다리는 동안 시인은 관념을 바꾸고 언어를 바꾼다. 저 바꾸는 일은 당연히 유희로서의 놀이와는 거리를 둔다. 그것은 고통이 수반하는 일이며 어렵게 새로운 주체성에 도달하려는 실험이기도 하다. 말들의 무용과 감정의 소용돌이와 자신이 점점 작아지는 듯한 기다림을 통과하면서 시인은 모든 말들의 진의를 의심하고 그 말들과 자신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한다. 언어를 자신의 힘으로 녹이고 새롭게 변형하는 개성이 박연준의 시에는 충만하다. 달리 말하면 저 기이한 말들의 조합에는 말들로 온전히 변하지 못한 열기와 간절함이 녹아 있는 셈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박연준의 시는 강력한 주술문을 보는 듯한 느낌마져 준다.
뱀아, 뱀아,
일어서볼래?
길게 엎드려 새벽을 밀지만 말고
뚜벅뚜벅 걸어와볼래?
직립한 네 중심을 내 두손에 주고
껍데기로 휘적휘적 걸어와볼래?
-「뱀의 노래」 중에서
일어설 수 없는 대상에게 일어섬을 주문하는 일은 말이 안되는 일이지만, 그 말이 안 되는 상상이라는 게 삶을 지속시키고 한 고비를 넘어가게 하는 힘이 될 때도 있다. 상상이 반복되는 동안 상상을 이루는 논리의 정합성이 중요하다기보다 상상을 이어가는 논리가 더 중요해진다. 달리 말하면 불가능을 지속시키는 언어의 기묘한 논리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논리는 말이 되는 것과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서로 정반대편에 놓인 사고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오히려 늘 옆에 붙어다니며 서로의 논리를 보완하고 강화하는 협력자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시는 이 협력을 깨뜨리면서 새로운 감각의 긴장과 생각의 긴장을 빚는 것이다. 그래서 뱀에게 “길게 엎드려 새벽을 밀지만 말고/ 뚜벅뚜벅 걸어와볼래?”라고 요청할 수 있다. 아니 이 요청은 뱀에게 한 것이 아니다. 치욕으로 물든 삶에게 하는 말일 수도 있고, 삶의 중심을 잃은 모든 존재들을 위해 건넨 말일 수도 있다.
삶의 공포에 예민하면서도 박연준의 시는 절대 고분고분하지 않다. 이 전투적인 에너지는 한국시의 주류를 차지했던 적은 없지만, 시단에 힘의 충전이 필요할 때마다 종종 기적처럼 출연하고는 했다. 박연준의 시의 힘참와 이웃하고 있기에 어떤 시들의 예민함과 어떤 시들의 눅진한 슬픔 또한 시로서 굳건히 서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시집에 등장하는 이 직접적인 발화는 시인이 다른 시인들에게 보내는 동지애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루시, / 난 겁 나/ 그게 뭐가 중요하니// 패배를 사랑하는 건 우리의 직업병/ 웃다가 쓸쓸해지는 건 얼굴이 미래를 보았기 때문”(「음악에 부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