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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
정재학의 시에서 선명함을 바라는 일은 옳지 않다. 그것은 그에게 소유가 가능한 사이비를 요구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곳의 풍경은 너무 선명해서 진짜 같지가 않아’(「Psychedelic Eclipse」). 이 말에는 정재학 시인의 자의식과 원한이 스며들어 있다. 그런데 원한이 너무 스며들어 체념조가 된 저 말에는 환상의 가장자리(‘Edges of illusion’)를 도려내는 날카로움이 없으므로, 덧붙여야겠다. 같은 시에서 그는 이렇게 폭발한 적도 있다. ‘착각하지 마라,/ ‘사실’은 ‘진실’과 다른 계단에 있다// 때로 리얼리스트들은 기독교처럼 폭력적이다’. ‘다른’의 의미를 계단의 방향성으로 읽는다면, ‘사실’은 위를 향한다. 그것은 우리를 미래의 천국이라는 가상으로 상승시켜 지구를 멀리서 내려다보게 만든다. 반면 ‘진실’은 ‘붕괴하면서 상승하는’(「백 개의 태양이 죽은 터널」)쪽이다. 이는 우선 우리를 ‘흥정’과 ‘죽음’(「토끼」)으로 얼룩진 현재의 폐허로 하강시켜, ‘거꾸로 도는 지구’에서의 ‘우울’과 원한을 경험하게 만든다. 이후 이쪽에도 미래는 있다. 사실이 천국과도 같은 미래를 보장하며, 끊임없이 그 미래를 보류하는 데 반해, 진실의 미래는 전미래(前未來)적이다. 그 미래엔 보장하고 있는 바는 없지만, 저 폐허의 경험과 연동해서 이제 곧 일어난다는 확신이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언급한 진실은 어떻게 시적으로 개시되는 것일까. 정재학은 ‘삭제’하지 않는 방식을 취한다. 그는 마치 Passagenwerk를 쓴 벤야민이 그러했듯, 구원의 순간이 올 때까지 되도록 모든 것을 기록하려 하면서, ‘분산(奔散)된 필름들을 손끝으로 찍어 모아/ 겹겹의 기억들’(「Edges of illusion(part Ⅶ)」)을 복원한다. 이 작업은 기존의 시공간적 질서에서는 불가하다. 분절되어 안정된 시공간은 이미 그것을 필요로 하며 동시에 관여하는 권력에 의해 자신의 불안함을 삭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시간은 결코 ‘과거와 결별’한 상태가 아니다. ‘나의 가장 약한 곳을 파고드는’ 것은 ‘오랜 기억’(「Psychedelic Eclipse」)이라는 시인의 말처럼 현존은 늘 과거의 위협을 받는다. 정재학 시의 시간이 자주 능동적으로 ‘역류’할 때, 이는 그의 시작(詩作)이 현실의 쇄신 및 미래의 기획과 관련되어 있음을 말한다.
나는 정재학 시의 불안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自序」에는 ‘많은 아름다움을 삭제’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그가 삭제한 아름다움은 스스로가 그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일 뿐이다. 거기에는 관계와 관계 맺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새로움이 없다. ‘내가 미쳐 있던 건/ 바람이 아니라 바람 소리였’다는 말과 ‘음표는 곳곳에 있지만/ 부딪히는 것만이 소리를 낸다’(「微分-음악」)는 시인의 말을 되새겨 보면, 아름다움이란 대상에 내재한 무엇이 아니라 대상이라는 범주를 초과한 무엇과의 새로운 관계 맺기라는 것을, 정재학은 정확히 알고 있다. 새로운 관계들에서 촉발하여 도래하는 그것은 예측이 불가하며 텅 빈 상태이다. 게다가 그것이 정재학에게 자주 ‘음악’처럼 오므로, 모든 음악이 그러하듯 정재학 시의 아름다움엔 내용이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앞선 말들은 종합하여, 나는 정재학의 시를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라고 부르고 싶다.
소품처럼 보이는 「하루는」은 의외로 정재학 시의 한 극단이다. 이 작품은 정재학의 시 특유의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실현시키면서 동시에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에서 유일하게 행복의 이미지에 가 닿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작품과 타 작품들의 말들을 접맥시켜 보면서 시집에 내재한 힘의 성질과 벡터(vector)를 확인해보려 한다. 이 과정은 저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 겨냥하는 바를 드러내 줄 것이다.
조카 지윤이가 컵을 들고 오더니 “삼촌, 마셔!” 소리친다 안을 보니 아무것도 없었다 갸우뚱 쳐다보자 다시 한 번 “마ㅡ셔!” 나는 고래의 눈을 가진 조카에게 취해 벌컥벌컥 마신다 지윤이는 단추를 조물락거리며 대답을 기다리다가 “맛있지?”라며 되묻는다 컵에서 피아노 소리가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하늘에 핑크 빛 돼지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날아가는 오후였다 -「하루는」 전문
우선 언어에 관해 이야기 해보자. 아마도 시인은 모호한 조카의 지시에 당황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우리를 포섭하고 있는 언어로부터 독자를 살짝 떼어놓으려 시도한 듯하다. 우리가 대상과 실체에 집착하며 언어의 지시적 속성에만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언어가 내어준 지식 안에서만 산다. 이때의 지식이란 주체의 소외와 분열을 가리고 있는, 승인된 언어의 노선을 따른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그것은 특정 권력에 복무하기가 쉽다. 이런 상태에서는 ‘준비된 말’(「계절의 연애」)만이 가능하며, 배제와 분리를 통해 어떤 말들의 권리가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 반면 정재학의 시들은 준비된 말이 아니다. 그것은 시공간의 질서를 허물며, 지금 막 정념과 감각 속에서 일어나는(happening) 말들이다. 「하루는」에서의 화자가 두 번째 강요에 움직이듯, 저 말을 처음 접한 독자들을 ‘즉단(卽斷)’에 실패하시 쉽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섬망(譫妄)’으로 여겨선 안 된다. 가령, ‘몸 전체가 두 귀 사이에 담겨 있는 것 같다’(「시원(詩源)」)는 발화는 대상을 추구하는 언어의 논리로 보면 전체(몸)와 부분(귀)의 크기를 혼돈한 이상한 표현이지만, 전체와 부분이라는 개념을 뒤엎는 감각의 논리로 따지고 보자면 전혀 이상하지 않다(어떤 소리에 몸 전체가 반응하는 순간을 떠올려보라). 정재학 시의 독자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그의 시를 개념으로 이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하루는」에서의 화자가 조카의 정념을 받아들이듯, 독자들은 그가 빚어낸 이미지들에 녹아있는 감각 혹은 정념의 흔적을 추적하여 그에 따라 ‘취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성공한 사람이라면, 정재학의 시가 쌍방의 소통이라고 가정되지만 실제로는 제 3의 방향에 종속되어 있는, 언어적 ‘거래를 중단’(「Edge of illusion(part Ⅸ)」)하는 실천임을 이해할 것이다. 이는 분명 지금까지의 언어가 쌓아온 축적을 허물어뜨리며 길을 잃는 일이지만, 정재학은 우리의 삶을 단속하는 저 언어 노선 위의 이정표들을 ‘한때 사실이었던 이정표’(「Psychedelic Eclipse」)라고 여기면서, 우리가 가야하고 도착해야 할 곳은 조카의 저 단호함(‘!’)처럼, 명확한 내용을 갖추기 이전의 에너지가 잠재된 자리라 믿는다. 그 자리는 ‘흥정’과 ‘거래’로 점철된 ‘거꾸로 도는 지구’를 다시 바로 잡을 에너지가 잠재된 곳이라고도 불릴만하다.
정재학의 시에는 두 종류의 에너지가 있다. 하나는 「하루는」에서 아이가 ‘마-셔!’라고 강제할 때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잠재된 에너지이다. 현실에 엄존하며 현실을 뒤집어 버리는, 그리하여 초-현실적 힘이라고 명명할만한 이것은 우리를 반복과 결별하게 할 뿐 아니라 제도와 체제에 구멍을 낸다. 그 에너지는 우리를 순식간에 ‘관통’하는, ‘시작점’을 ‘알 수 없’는 ‘과정일 뿐’이며 ‘어디까지 가는지’(「시원(詩源 )」)를 알 수 없는 형식을 취하는데, 중요한 것은 이 힘이 정의(Gerechtigueit)와 연관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그것은 기득권자에 의한 일방적인 언어적 거래를 중단시키며, 어떤 말도 자신과 다른 말을 가두거나 덮지 않는 관계를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의 자리를 연다. 이 때문에 정재학 시의 말들은 이해되기 이전에 이미 따뜻하게 느껴진다. 두 번째 에너지는 화자의 ‘自爆과 節制’(「微分-편지」)에 있다. 조카의 알 수 없는 말에 머뭇거리던 화자는 어느 순간 자신이 처한 자리를 내팽겨 치고 나와 ‘자폭’한다. 기갈 든 사람이 무언가를 충전하듯, ‘벌컥벌컥’ 기운차게(energetic) 마셔대는 소리를 들어보라. 이는 전복(全福)을 위한 전복(顚覆)이 늘 있지 않고 ‘드문드문 있’(「微分-낭객」)음을, 그리고 그 순간이 휙휙 지나가는 것임을 아는 자의 태도이며, 그것을 현실에 붙들어 매려는 의지이기도 하다. 그의 말들이 빚어내는 혼란은 이 자폭의 에너지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변혁의 기미가 포착되는 순간 그는 거기에 몰이해적으로 뛰어들기 때문이다. 동시에 정재학의 시엔 어떤 ‘절제’가 뒤따른다. 조카의 되물음에 무언을 유지하는 화자처럼, 「수중 극단」에서의 ‘어릿광대’가 ‘무덤에서 튀어나올 시간’을 위반하는 것처럼, 어떤 속된 기대에도 부응하지 않으려는 절제. ‘추방당한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밖으로 가기 위’(「백 개의 태양이 죽은 터널」)한 그 절제 말이다. 나의 추측대로라면 시인은 자연화(自然化)를 거부하기 위해 「하루는」에서 일정 시간을 기민하게 삭제하였다. 이는 조카의 되물음에 즉단하여 답하지 않고, 마지막에 가서 행복한 이미지를 토해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을 지우고 있다는 말인데, 이 계속하는 충실함이 없다면 ‘자폭’은 희극으로 전락했을 것이고 잠재된 에너지는 여전히 묻힌 채로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정재학의 시집에 깃든 힘이 겨냥하고 있는, 혁명과도 같은 ‘새로운 화성학(和聲學)’의 기획은 불가능했으리라.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이 행복한 이미지의 결말은 정재학의 시에서 예외적이다. 아마도 이 극단은 우연히 빚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정재학의 시는 대체로 행복보다는 불행 쪽에 놓여있으며 ‘자학’(‘나는 나를 학대했을 뿐이란다.’)과 죄의식(‘매일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을 자주 내비친다.(「편지, 영월에서」) 광대 소녀의 거꾸로 도는 지구를 해설하면서 ‘혁명이 늘 상처를 기폭제로 삼아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슬프다’고 한 해설자의 언급은 적확한 표현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덧붙이고 싶은 말은 시인을 향한 부탁과 기원이다. 시인은 부디 한국시의 한 극단에 서서 ‘지치지 않으리라,’던 다짐을 지켜주길, 나 또한 그때까지 ‘이름 모를 촛불이’되어 당신의 시를 ‘지킬 것이’니.(「Psychedelic Eclip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