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검색
본문
윤해서 <0인칭의 자리>-한 사람과 모두를 위한 자리
윤해서 <0인칭의 자리>(문학과지성사, 2019)
장면과 사유와 감정만으로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될 수 있다면 그 소설의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은 윤해서라는
이름으로 불릴 것이다.
이 소설은 무수한 나와 그들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드라마를 만들지 않고 어떤 상태를 보여준다.
거리를 걷는 사람
누군가를 떠난 보낸 사람.
글을 쓰는 사람
누군가를 기억하는 사람.
밥을 먹고 있는 사람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
예배당에 앉아 있는 사람.
누군가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유령이 되어 떠도는 사람.
유령이 되어.
유령이 되어.
영원히 빈자리를 찾는 사람.
우리가 지나쳤거나, 겪었거나, 만나게 될 사람들.
혹은 우리 자신의 그림자들.
한 사람의 다음 이야기가 궁금한 순간
소설은 이미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넘어가 있다.
돌아보면 그 사람이 머물러 있는 자리는 희미해져 있다.
조금씩 언어의 지면에서 발을 떼고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다.
소설은 독자에게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들려준다.
목소리는 정지된 화면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읆조림의 울림이다.
그 목소리를 어떻게 설명해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영혼이 내 몸을 지나고 있다.
그러한가.
내 영혼이 누군가의
몸을 통과하는 중이다.
그러한가.”(65p.)
한 편의 소설을 읽고 우리는 이야기를 요약하거나 과장해서 설명을 하곤 한다.
<0인칭의 자리>는 익숙한 독서 공유 행위를 무화시킨다.
누군가 어떤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타인이 되어
삶의 한 순간만이라도 그대로 표현하고 싶었던 거라고.
그 순간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었던 거라고.
요약과 과장이 아닌 언어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읽어내면 좋겠다고.
“나는 언제부터 1인칭, 하나였을까. 나에 대해 말하는 나는 어쩌다 하나뿐인 1인칭이 되었을까. 나는 하나도 둘도 아니고, 떼로 나는 하나와 둘에도 턱없이 모자라고, 나는 0인칭이나 무한 인칭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쩌다 나는 1인칭이 되어서 혼자인가. 어떤 나도 하나는 아닌데.”(140p.)
어떤 나도 하나는 아닌데.
우리가 저마다 다른 타인을 바라볼 때 나는 온전한 나인가.
또 다른 나인가.
몇 개의 나인가.
그리고 누군가를 대상으로 인칭을 만들고 시점을 만들고 이름을 지어주고
관계를 만드는 소설가의 자아는 몇 개의 '나'로 갈라지는가.
작가는 이 질문을 계속 하고 있다.
그것이 작가의 문학적 행위이자 윤리의 목소리일 것이다.
“어둠과 빛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한 순간, 무의미가
유일하게 가능해지는 바로 그 순간,”(79p.)
잠깐 반짝였다 사라지는 반딧불이의 언어를 쫒아
그 아름다움의 잔상을 끝내 물리칠 수 없어
누군가는 이 책을 다시 펼쳐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