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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책] 신춘문예 희곡 당선 작품집 2011 - 아빠들의 소꿉놀이

등록일 2019.11.22 / 작성자 고*혜 / 조회수 456  


참 아기자기한 제목이다. 이 작품 속 소꿉놀이란 해고당한 가장들의 회사원 위장교습을 말한다. 사실 2011년도에 나온 작품이라는 것을 감안하지 않고 본다면 ‘또?’이 얘기, 이 소재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첫 장을 읽는 순간, 일본영화 < 도쿄 소나타 (2009 개봉) >가 떠올랐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이 실직 당한 남성 가장이다. 비슷한 소재를 가지고도 이 희곡만이 가진 장점과 콘셉트를 꼽아본다면, 위장교습이 아닐까? 현실에서도 그렇고 많은 작품에서도 가장이 오랫동안 지켜온 일자리를 잃는 것은 인생의 큰 파장으로 그려진다. 굉장히 비참한 그 상황에서 누가누가 더 비극적인가 대결을 하는 것은 아니고, 선배 실직자가 새내기 실직자에게 위장술을 가르친다. 그 과정이 캐릭터들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져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전개된다.

캐릭터는 꾸부정과 단발, 대머리와 파마로 묶을 수 있다. 아직 젊고 미숙한 부부에겐 위기가 오면 심리적 변화가 꾸부정과 같이 겉으로 드러나고, 힘든 상황에서도 단발이라는 인물은 외적인 면모를 가꾸는 것으로 나름 해석하면서 작품을 읽었다. 또 대머리는 자주 희화화되는 대상인데, 무언가에 통달한 이미지도 느껴졌다. 파마는 흔히 우리 사회에서 여성성을 잃은 중년 여성을 표현할 때, 아무렇게나 볶아버린 머리(파마)로 그리곤 하는데 대머리와 꾸부정이 외적으로 완전히 상반되지 않는 데 비해 파마와 단발은 외적으로 상반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 희곡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꾸부정과 대머리, 두 번째는 단발과 파마, 세 번째는 다시 꾸부정과 대머리. 첫 번째와 두 번째 그리고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꾸부정과 대머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안타까운 상황임에도 말장난이나 위장술 등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게 이 작품의 강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단발과 파마에서 그 재미가 감소했다. 초반에는 데칼코마니처럼 능청스러운 경력자와 미숙하지만 의지만은 확실한 캐릭터의 조화를 그대로 이어갈 줄 알았는데, 왠지 단발과 파마한테서는 위계질서 같은 게 느껴졌고 분위기가 우중충해졌다. 교습 조건(?)에서부터 그게 드러났다. 대머리는 꾸부정에게 무료 교습을 하는 데 비해 파마는 단발에게 음식이나 자잘한 것들을 요구한다.
대머리와 꾸부정, 동병상련인 이들 간에는 왜 위계질서가 없는 걸까? 처지가 비슷하기 때문에 그런 걸까. 도리어 대머리가 지금 어떠어떠하다고 생각했죠. 지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죠. 하는 대사들을 보면 꾸부정이 대머리를 스승으로 대하고는 있어도 딱히 섬기고 있지는 않구나, 우습게 보고 있구나 하는 느낌도 들었다. 반면 파마와 단발은 말투에서부터 윗사람, 아랫사람으로 나뉜다는 느낌을 받았다. 밖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현실과 멀어지기 시작한 시점부터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현실을 짊어지게 되고, 그 질서가 여자들한테서 나타난다고 보면 좀 과한 거 같기도 한데 당장 생계 위기에 부딪히는 것은 실질적으로 그들이다.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우고 자판기 커피를 마시고, 유니폼을 입은 채 모래 위를 뒹굴고, 회식한 척 오징어와 소주로 입을 헹구고. 이런 허상을 만드는 행위와 달리 말이다.

나는 실직 경험도 없고, 실직은커녕 취직조차 해본 적이 없어서 그들의 심리를 헤아리기엔 한없이 부족하지만 놀이터에서 그야말로 소꿉놀이하는 이들을 보면서 답답했다. 슬픔을 추스르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도 아니고, 가족 앞에선 말 못 한 채 끙끙 앓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한데 진짜 저 방법밖엔 없는 건가? 싶었다. 차라리 단발과 파마가 나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허상을 보여줬으면 현실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등장인물 소개에서도 아내들을 굳이 등장시키지 않고 2인극도 가능하다고 적혀 있는데 결국 하나의 상황을 두 인물을 통해 그 양면을 보여주는 건데 전혀 다른 세계사람 같기도 하고... 특히 세 번째 부분에서 파마는 결국 술 파는 곳에서 일을 하고 대머리 본인도 가발을 주워 쓰는 둥 외모에 신경을 쓴다. 마치 아빠방이라는 곳에 출근하기라도 할 것처럼. 여기서 위장과 위장 그 이후엔 가장 비극적인 현실에 맞닥뜨린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상징적이라는 것을 감안하고도 너무 갑작스러웠다. 뭐가 현실이고 뭐가 비현실인지 좀 헷갈렸다고 해야 하나. 지극히 현실적―교습 비용으로 먹거리를 요구하거나 남편과 허리띠를 졸라매는 둥―이다가 너무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다. 하다못해 희곡에서 제시된 마트 일이나 그 밖에 공장일, 부업 등등... 많지 않은가.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데, 스스로도 성판매는 최후의 상황이라고 생각한 이에게 왜 그리 쉽게 비극을 쥐어 주느냐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혹은 재난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여성이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방법 어쩌면 최선의 방법이 성판매이다. 희곡 속 인물일 뿐인데 너무 마음이 불편하고 답답하다. 이게 현실인 걸! 이라고 하면 그거야 그렇지만 속상한 건 어쩔 수 없다. 희곡에서라면 좀 다른 방법을 제시해줄 수도 있지 않나 하는 기대감도 있었는데.

놀이터라는 공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놀이터는 아이들이나 아빠들의 소꿉놀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둘 다 현실에서 가져온 놀이지만 결국엔 허상이라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이 놀이터에는 왜 아무도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머리와 꾸부정의 교습을 보면서 자꾸 긴장감이 맴돌았는데 그 까닭이 누군가 튀어나오지 않을까? 하는 까닭이었다. 진짜 소꿉놀이하던 아이가 등장했더라도 재미있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실직 당한 가장의 이야기를 볼 때 항상 궁금한 게 있다. 왜 다들 회사원일까? 세일즈맨, 대표적으로 퇴직과 승진 사이에 있는 회사원. 노동자를 한정적으로 그린 데에 이유가 있을까? 회사원은 말 그대로 회사의 일원이다. 회사의 운영을 도우면서 월급을 받고 승진하거나 정리해고 당할 수 있는 자리다. 학교 졸업 후 평생을 회사에서 일한 사람이면, 회사가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면서 애증의 공간일 것 같기도 하다. 회사원은 회사가 원하는 방향대로 일해야 하고, 누군가는 야근으로 모자라 주말에 출근하기도 한다. 그것으로 업무가 끝나는 게 아니다. 회식에 참여해, 상사의 비위를 맞춰야 하고 가끔은 체육대회에서 골이라도 하나 넣어야 한다. 만약 회사원이 아닌 다른 직업군을 가진 인물이 주인공이라면 어땠을까. 기술직이면 재취직이 회사원보다 수월한 편일까. 그래서 주인공으로는 적합하지 못한 걸까? 사실 회사원일 수밖에 없는 게 사회현상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회사원이라는 이미지를 생각해봤을 때, 정장 차림에 중년이라면 어떤 무게감이 있을 것 같고 자존심을 놓지 못하는 모습을 상상하기가 더 쉽다. 많은 사람들이 직장인이라면 사무직 회사원을 떠올리기도 하고. 하지만 내가 실직 당한 가장의 이야기를 쓴다면 회사원은 쓰지 않을 것 같다. 자꾸 떠오르는 건 기술직 노동자인데 어쩌면 보편에서 좀 멀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중요한 건 어떤 직업군을 가지든 실직자와 그 주변의 변화일 테지만. 그래도 회사원보다는 좀 더 직업적인 특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고, 왠지 일용직 노동자나 기술직 노동자는 희곡보다 소설이랑 더 잘 어울리는 느낌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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