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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작가의 영혼 / <영혼 없는 작가>
『영혼 없는 작가』를 반 쯤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언젠가 어떤 날, 나는 이 책에 대해 말하게 되리라.’
다 읽고 난 후 노트에 만년필로 또박또박 이렇게 썼다.
‘영혼 없는 작가의 영혼. 당신을 만나고 싶다.’
그 날 이후, 다와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이따금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 문장은 다와다가 쓴 글일까? 다와다의 영혼이 쓴 글일까? 아니면 둘이 함께 쓴 글일까?
작가와 작가의 영혼은 한 몸에 깃든 다른 존재다, 라는 은유는 다와다만의 생각은 아니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글을 쓰고 싶어 하는(쓰는, 쓰라는, 쓰게 만드는...) 정체불명의 느낌(욕망, 요구)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실 몸 안에 들어온 글쓰기 기생충 때문이에요. 기생충이 있으면 그것이 먹으라고 하는 것만 먹게 되지요. 손톱만큼 작은 미물처럼 보이지만 숙주를 조종하는 것처럼 작가의 삶도 그런 겁니다. 그러니까 작가는 몸 안에서 기생충을 빼내거나 아니면 이것이 운명이다, 생각하고 글을 써야 해요.
그 시절의 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내게도 약간 그런 부분이 있는 것 같아. 하지만 당시 내가 동의했던 건 순전히 은유적인 측면이었다. 만약 누군가 진짜로 글 쓰는 모종의 존재가 내 안에서 독립된 상태로 나와 무관한 삶을 살며 나를 조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면 웃었을 거다. 그러나 『영혼 없는 작가』를 읽었을 땐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 글이 요사의 글보다 더 설득적이거나 더 논리적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 많이 수긍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다와다의 생각은 그야말로 시적인 인식에 가깝고 사유와 언어에 다가서는 신비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 밤. 나는 불을 끄고 누워 깜깜한 사방을 향해, 영혼이 일어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되는 그곳을 향해, 중얼거리게 된다.
영혼은 어떻게 생겼을까. 누구와 닮고, 무엇과 비슷하고, 그것들과 또 얼마나 다를까. 그것은 어떤 형상일까. 일반적인 상상처럼 그림자이거나 투명하거나 어떤 기(氣)로서 존재하는 자일까. 아니, 형상화할 수 있긴 한 걸까. 다와다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나에게 인간의 영혼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가 있다. 첫 번째 상상에서 영혼은 내가 튀빙겐에서 처음 먹어 본 긴 하드롤빵처럼 보인다. 이 하드롤빵들은 슈바벤 지방에서는 영혼이라 부르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모양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혼은 그 빵처럼 몸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영혼은 오히려 몸속의 빈 구멍 같은 것인데, 이 구멍은 이러한 구멍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거나 태아나 아니면 사랑의 증기 같은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
인간의 영혼은 몰라도 내 영혼의 일부는 묘사할 수 있겠다. 그에겐 듣는 입이 있다. 말하는 눈동자가 있고 섬모처럼 작고 부드러운 수 천 개의 팔이 있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비밀이 쌓이고 기억은 늘어간다. 책장의 책이 한 칸 씩 채워지듯 그가 들을 때 그의 입은 움직인다. 그의 눈동자가 가끔 나를 응시할 때가 있다. 그의 눈동자 한 가운데서 음성이 들린다. 스피커의 부드러운 검은 막처럼 떨며 울리는 한 소리가 있다. 때로 그 눈동자는 내 눈동자 안쪽에 위치해 눈동자 둘을 부드럽게 포개어 내가 보는 것을 함께 본다. 그가 나를 만질 때가 있다. 꿈의 한 가운데 떨어지듯 눈을 떴을 때 부드럽게 감겨주는 손가락들이 있다. 어느 슬픈 날. 신열에 시달려 둥글게 몸을 말고 땀을 흘리며 울고 있을 때 뒤에서 누군가 안아 준 적이 있다. 나는 그가 영혼이었다고 믿는다. 두 개의 팔이 아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팔로 감쌌다. 그 순간 나는 아마도, 어쩌면, 알 속에 숨은 부드러움처럼 물과 같은 것으로 해체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묘사할 수 있는 것은 가까스로 이정도 뿐. 나는 그의 전체적인 외형을 본 적도 없고 그의 얼굴을 대한 적도 없다.
직관. 예감. 본능. 영감. 감각. 시적인 힘. 글쎄, 그런 것들이 정말 있는 걸까? 다와다는 언어를 실존하는 생물 혹은 사물처럼 대한다. 그 부분이 나를 깊숙하게 건든다.
요즘 들어 점점 내 마음에 드는 독일어 단어 중의 하나가 ‘방’(zelle/세포)이라는 말이다. 이 단어 덕분에 나는 내 몸 안에 있는 작은 많은 방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방마다 다 소리 내는 목소리가 하나씩 들어 있다.
어떤 방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바로 동시 통역가를 위한 방이다. 인간의 몸 또한 통역 작업이 행해지는 여러 방을 가지고 있다. 내 추측에는 여기에서는 원본이 없는 통역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물론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 원본 텍스트를 갖는다는 기본 생각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이 원본 텍스트가 보존되는 장소를 영혼이라 부른다.
생물이라면 그것의 기질과 생리적 변화와 생태 같은 것을 연구하고 관찰한다. 사물이라면 그것이 갖는 물리적 속성과 오브제로서의 의미, 주변 풍경과의 어울림. 용도로서의 기능 같은 것을 고민한다. 그럴 때 언어는 단순히 존재의 이름이 아니고 존재 자체가 된다. 기의를 표현하는 기호가 아닌 기호 자체가 기의가 된다. 무엇을 설명하는 도구가 아닌 스스로를 설명하는 고유한 의미가 된다.
언어가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오면 만질 수 있게 된다. 손에 쥘 수 있게 된다. 그것의 향을 맡고 그것의 질감과 때론 그 속을 흐르는 체액과 안쪽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뼈와 근육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맥락 없는 연상으로 떠오르는 뜬금없는 얼굴.
다음 장에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동화의 기이한 팝업북. 다와다가 제시하는 언어적 상상력은 자극된 적 없는 세포를 자극하고 열린 적 없는 문을 노크한다.
일기를 쓰고 싶게 하는 글. 그것은 가장 강력한 종류의 독후감이다. 어떤 아름다운 충격. 그것은 나로 하여금 위험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 고해성사를 하고 싶다. 질 나쁜 고백을 하고 동시에 죄를 용서받고 싶다. 기쁨이든 분노든 그것이 무엇이든 말하고 싶게 만든다. 그러나 말 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전화할 사람도 없고, 작가는 만날 수 없는 곳에, 때론 이 세계가 아닌 곳에, 때론 죽었고, 때론 미래의 사람이니까. 그래서 나는 내게 말해야 하는 것이다. 뭐든 쓰고 뭐든 기록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