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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연호 시집, <천문>

등록일 2019.11.11 / 작성자 송*원 / 조회수 93  

  언어가 압도한다. 조연호 시의 저 첫 느낌을 잊지 말자.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자. 조연호의 시를 읽고 난해하다고 말할 때, 그 말은 확실히 저 느낌을 지우고 있다. 이를 고려한다면 조연호의 시를 읽고는 곧바로 숨겨진 의미나 사건을 들춰내길 욕망하는 태도는 조급증에 가깝다. 의미망에 접근하는 통로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은 채, 그의 언어는 오히려 독자들을 작품 바깥으로 밀어낸다. 말의 장벽을 통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독자들은 그의 언어를 억지로 이해의 지평으로 끌고 가서 분석하려 골몰하는 대신에 먼저 탐닉하는 것이 좋다. 무엇을 탐닉하는가. 쉽게 듣지도 보지도 못한 낯선 언어들이 밀려와 독자를 압도하는 기운과, 내용은 불분명하나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한 비밀을 품은 것으로 추정되는 말들의 생경함, 더불어 그 언어들을 수혈해주고 있을 낯선 인식 공간에 빠져보는 탐닉이 필요하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백과사전은 기본이고 잡다한 종류의 책들을 들쳐보는 수고가 필요함을 물론이거니와 모든 예술의 향유조건인 상상력의 발휘가 절실히 요구될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시인이 세공한 구절들과 어울려 지내다보면 어느 순간 시인이 언어를 세공했던 과정 속으로 진입할 때가 있다. 거기에서 우리는 존재들 간의 ‘비감각적 유사성’(unsinnliche Ähnlichkeit)을 읽어내는 데 애쓰고 있는 시인과 마주하게 된다. 아마도 시인 스스로는 그 행위를 ‘착오’(“그럼 천천히 여름 바람이나 맞으며 착오를 시작해볼까?”, 「무한회랑(無限回廊)에서」)라고 부를 것이다. 조연호의 시에서 ‘벌레’는 ‘별’이면서 동시에 시인 자신이거나 또는 언어가 될 수도 있는 이유가 저 ‘착오’에 있다. 같은 연유로 의해 ‘할아버지’는 ‘신(神)’과 다르지 않고 어머니는 ‘하녀’와 가깝다. ‘착오’는 그렇게 조연호의 시에서 성(聖)과 속(俗)의 거리를 지운다. 그뿐인가. ‘흰 건반’에서는 불면의 밤을 읽고 ‘슬픔’을 ‘예능’처럼 다룰 정도로 ‘비감각적 유사성’에 예민한 그의 심미안은 사물과 사태 속에 숨어있는 감정들을 발굴하는 데도 발군이다. 

  진정 언어에 관해서라면 조연호는 한국의 어떤 시인보다도 사치스럽다. 비감각적 유사성을 읽어내는 능력은 그의 시에 경계 없는 다양한 언어들을 회집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그의 시에서는 신화의 언어가 자연과학의 언어와 만나고, 종교의 언어가 음악의 언어와 충돌하며, 미술의 언어가 철학의 언어를 감싸기도 한다. 다종다기한 언어들이 한 지면에 모여 다양한 빛깔의 향기를 피울 때, 주의할 것은 이를 단지 시가 될 수 있는 언어의 영역을 확장했다고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조연호의 특이한 언어 배치는 전혀 다른 목적을 겨냥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그는 분화된 언어에 흔적으로 남아 있는 ‘분화되기 이전의 언어’에 접근하려는 것은 아닐까. 다시 말해, 조연호는 일정 경계 안에서 세공된 언어들을 시 안에 다시 녹여내는 과정에서 경계가 형성되기 이전의 순간들이 솟아나게 하는 작업을 수행하는 것 같다. 

  우리가 언어를 고정된 의미를 지닌 대상으로 사용할 때 사실은 언어가 지닌 불투명한 이미지들이 그 주변을 맴돌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 시인은 자신이 사용하는 시어의 방향을 모든 분과학문의 이전으로 또는 ‘인칭과 대상’이 성립하기 이전의 ‘근친’의 언어 쪽으로 이끈다. 한 시에서 시인은 “오, 운문이여, 그대도 역시/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를 훼손하도다”(「꿈의 취향」)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여기에서 ‘사람의 형상’이란 앞서 말한 경계 지어진 언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의 형상이 드리워진 말들에는 사람과 관련된 일종의 금기와 규약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 금기와 규약보다 더 큰 문제가 소외다. 거기에는 사람을 설명하는 언어를 벗어나거나 초과하는 어떤 언어의 움직임이 제거될 수밖에 없다. 독특한 읽기 능력을 소유한 시인은 그와 같은 언어의 기억에서 인간보다 ‘더 많은 다리’를 가지고 세계를 더듬으며 꿈틀거리는 ‘벌레’의 형상을 본다.  

  그 벌레를 쫒아 조연호의 시를 읽어보자. “하늘의 문자에서는 분무 살충제를 뒤집어쓴 벌레처럼 소름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소리가 들려왔다”(「천문(天文)」)는 구절에는 별과 문자 그리고 벌레의 움직임이 혼합되어 뒤엉킨 상황이 담겨있다. 여기에 “메아리로 돌아오는 내 고백에 포충망을 걸고/ 모기약을 뿌릴 테다”(「검은 밤 뒤의 흰 밤」)란 구절까지 더해 보면 조연호 시의 ‘벌레’는 문자 또는 말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연호의 시에서는 그렇게 시인과 벌레와 언어가 근친의 상태로 얽혀있다. 그러고 보니 이 각별한 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시인은 ‘은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이’란 말을 패러디하여 자신을 ‘벌레를 쥐고 태어난 아이’로 그린 적도 있다. 그 시(「벌레를 쥐고 태어난 아이(1983~1986)」, 󰡔저녁의 기원󰡕)에서 화자는 자신의 기원에 악몽을 자리하게도 했었으니(“나는 수형도(樹型圖)의 맨 아래쪽에 있었고/ 악몽은 가장 꼭대기에”) 정리하면, 벌레-별-시인-언어-악몽이 모두다 근친의 관계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아마도 조연호의 시의 흥미로운 독법 중 하나는 저 근친의 관계를 무한히 확장시키는 과정에 있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말과 사물 사이에 숨죽이고 있었던 혼종적 목소리들의 출현을 경험하리라. 가상적 주체성의 자리를 허물며 틈입해오는 저 혼종적 목소리들의 매혹을 잘 알기에 조연호는 오래전부터 언어의 습득과 활용이 남다른 언어의 귀족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또한 그 목소들에 자신의 귀를 전부 내주고 살았기에 그는 이미 오래 전에 ‘행복한 난청’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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