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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숙 시집, <오래 들여다본다>
이 마음에는 지붕이 없다. 그래서 비가 오고 세월이 가고 바람이 불 때마다, 이 마음은 무방비다. 세월의 상처에, 요동치는 감정의 강우에, 바람 같은 인연들에 속수무책이다. 하염없이 낡아가는 운명을 품고 있는 듯, 그리하여 마침내는 점점 더 투명해져서 그것의 본래처럼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지려고만 하는 이 마음. 권지숙의 첫 시집 오래 들여다본다에서 발견되는 마음의 양태에 관한 이야기다. 그의 시집에서 풍화된 마음의 반짝거림이 본다. 그 마음의 혼란과, 그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보자.
해질녘 용산성당 성직자 묘지/ 돌계단에 주저 앉아 지는 해 바라본다/ 아늑하다!/ 산 자보다 죽은 자 가운데 있을 때/ 편안하다/ 나의 고해성사는 경건함으로 떨린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다 내 탓이로소이다 -「용산성당」 부분
돌아가신 아버지(「아버지는 웃고 계시고」)와 지는 꽃(「낙화」)과 임종의 시간(「임종」), 그리고 서서히 죽어가는 도시(「야행기 5」)까지, 인용한 시의 구절 뿐 아니라 이 시집의 많은 시들은 저처럼 죽은 자를 마음의 곁에 두고 쓰여 있다. 시인은 왜 산 자들이 아니라 죽은 자들 가운데 있을 때 편안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산 자들에게는 시간을 사유할 틈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에 이르러 시간이 정지되는 순간, 시간의 틈이 열리고 그 틈에서 비로소 자신의 형상 밑바닥에 고인 무형의 요동침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시인이 묘지사이에서 발견한 저 ‘경건한 떨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광기’라고 이름 짓고 또 누군가는 ‘그것’이라고 밖에 이름 붙일 수 없던 저 ‘떨림’은 언어 이전으로부터, 또한 생각 이전으로부터 이곳으로 도래한 그 무엇이다. 그러니 ‘나’라는 구성물의 이전상태를, 그것의 무구함과 순정함을 감지한 이에게 현실의 ‘나’는 만사의 부정적 원인으로 인식될 가능성은 짙을 것이고, 하여 시인은 “내 탓이오”라는 고해성사를 반복하는 중일 것이다. 아마도 권지숙은 시를 쓸 때마다 ‘나’라는 말의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나’를 언제고 뒤엎을 수 있는 불안을 오래 들여다보는 것만 같다.
아무도 없다. 깜깜하게 닫아놓은 커튼 틈새 먼지 사이를 비집고 도둑처럼/ 눈 번득이며 햇살 한줄기 집 안으로 들어온다 날카로운 햇살을 피해/ 웅크리고 눈 크게 뜨고 앉아 벽에 결린 이중섭의 게……아무도 없다 -「게를 잡다」 부분
저 불안이란 사실 “아무도 없다”는 깨달음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있다’라고 믿는 것 안에 완고하게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음’일 뿐이고, 실은 대개가 우리의 환영에서 비롯된 가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듯한 이 시의 목소리 배면에는 보이지 않는 그림이 하나 있다. 그 그림은 이중섭의 그림이면서도 이중섭의 그림이 아니다. “웅크리고 눈 크게 뜨고 앉아”있는 자세는 이중섭의 그림 속 인물들이 자주 취하는 그것이지만, 이 시에서 그것은 시인이 취하고 있는 포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지금 이중섭의 적막한 그림 속에 자신을 들여놓으려 하는 중이다. 왜일까. 그 속에 ‘나’의 어떤 거듭남이 있기라도 한 것일까.
젖은 종이처럼 달라붙은 습기 속에/ 드러누워 나를 썩힌다/ 썩히는 일의 깊은 경건함/ 굳은 빵과 짓무른 채소와 먹다 남은 과일 들/ 집 안의 먼지 쌓인 구석구석까지/ 휘감기는 축축한 혓바닥/ 우울과 비관과 낙심을 뒤섞어/ 형체도 없이 썩히고 썩혀서/ 뭉글뭉글 아름다운/ 푸른곰팡이 한 무더기 -「장마」 전문
한 시에서 시인은 아주 단순한 자연적 사실을 통해 인간의 운명 속에 내재한 비극성을 떠올리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위로 던져진 돌은 떨어져야 한다……”(「야행기 5」)는 표현이 그것인데, 저 말을 인용한 시 「장마」와 같이 읽으면 다소 의외의 전언이 발견된다. 「게를 잡다」에서 드러나는 비현실적 공간으로 자신을 집어넣으려는 적막한 정념과 「장마」에서 읽히는 자신을 썩혀버리려는 태도에는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불릴만한 것을 내재하기 때문이다. 시집의 도처에서 “우울과 비관과 낙심”에 휩싸인 상황에 놓인 듯 보이던 시인이 실은 자신을 더 파국적인 상태로 몰아감으로써 행위(act)하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시인은 자신을 불가해한 운명에 의해 “위로 던져진 돌”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가해한 운명과 더불어 자신을 더 높은 허공으로 던져내던 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자신의 요동치는 마음을, 그것의 혼돈과 (불)가능성을 오래 들여다본 자에게만 가능한 결단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권지숙의 시에서는 하루가 가면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하루가 온다(「먼 하루」). 이는 어제의 폐허 위에서, 그 폐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무시간적 활력을 거듭 발견하고, 그를 통해 오늘을 다시 쌓아낼 수 있는 자에게서 가능한 시간 사유법일 것이다. 이러한 사유가 권지숙으로 하여금 과거의 아픔에 맹목적으로 고착되려고만 하는 마음의 장례식을 치르도록 강요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마음의 장례식을 치른다고 해서 마음은 죽지 않는다. 인간의 언어는 마음과 닮은 몸이 새로운 마음을 먹는다고 오래전부터 기록해 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