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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기 시집, <언손>
시의 오래된 존재 근거 중 하나는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보는 시선에서 연유한다. 없는 자리를 공들여 드러냄으로써 그 자리에 스며들만한 꿈을 노래하는 일은 시가 행해오던 기능 중 하나이다. 시는 ‘아직 없는 현실’을 가까운 미래에 ‘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이미지로써 현실을 재촉하는 언어형식이기도 하다. 이때 시가 노래하는 꿈은 경이롭게도 한 개인의 내밀한 욕망의 차원에만 머물지 않는다. 좋은 시가 획득하고 있는 보편성이란 어쩌면 저 꿈에서 나라는 한 개인을 지우는 일에 성공한 흔적일지도 모르겠다. 시인 이세기 역시 이와 같은 시의 공적 기능에 남달리 예민한 면모를 보인다.
비어 있는 자리를 바라보기 위해 그가 먼저 행하는 일은 비어 있는 자리를 임시로 채우고 있는 존재를 비워내는 일이다. 이세기 시인의 시가 지닌 이 비우는 형식은 얼마나 견고한지 그것은 돌연하거나 파괴적이라기보다는 응당 그래야 할 것처럼만 여겨진다. 그렇기에 이세기의 시의 단정한 침묵은 유달리 강렬하다. 행과 행 사이 또는 연과 연 사이에서 어떤 말들이 사라질 때, 그 순간 그의 시는 오히려 빈틈없이 꽉 채워진 듯하다. 이 비움의 과정 속에서 ‘나’의 행방은 묘연해진다. 이세기의 시에서 ‘나’는 늘 ‘나 아닌 것들’에게 자주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다. 그러는 사이 ‘나’가 채우고 있던 자리는 나보다 크거나 또는 나의 배후에 위치함으로써 나를 있게 해주는 누군가의 장소로 자연스럽게 변한다. 가령, 이 시집의 서시인 「염하」를 보자.
내 여기 몇번 왔던가// 한번은 연꽃 보러/ 또 한번은 고인돌 보러// 늙은 어부는/ 저녁물을 보고 강둑으로 사라지고// 자궁을 열듯 쏟아지는/ 울음소리/ 울음소리// 상형문자를/ 허공에 걸어놓고/ 강을 거슬러/ 염하로 날아드는 가을 새떼// 누군가/ 강 언저리에 서서/ 비뚜름하게/ 강의 북두를 바라보고 있다
-「염하」 전문
이 시는 ‘나’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누군가’의 이야기로 마무리된다. “늙은 어부”가 사라질 때 시인은 동시에 ‘나’ 또한 사라지게 한다. 대신에 그곳에는 누구의 것인지 확인할 수 없는 “울음소리”가 출현한다. 소유의 개념에 익숙한 우리는 그것의 주인을 찾는 일에 관심을 두겠지만, 시인이 집중하는 것은 누군가 울고 있다는 정황자체이다. 시인이 굳이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에 주목하지 않는 이유는 어쩌면 내 것 남의 것이라는 구분이 불필요한, 누구나가 공유하는 울음이라는 판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저 울음은 특정한 누군가의 울음이 아닌 불특정 다수인 “누군가”의 울음인 셈이다. 시인은 그 울음소리를 뜻을 알 수 없는 “상형문자”처럼 우리 앞에 내놓는다. 도대체 이 이상한 상형문자는 무엇일까.
언 손을 읽다보면 저 상형문자의 주변에서 작용하고 있는 또 다른 문자를 발견할 수 있다. “생활” 또는 “생계”가 바로 그것이다. 「생계 줍는 아침」이나 「생업」, 그리고 「부채」같은 시편들은 생을 연계해 나가기 위해 고된 생활(업)에 묶인 육체들이 등장한다. 「언 손」에 등장하는 “언 몸”과 “언 손” 또한 노동으로 굳어진 저 육체를 환기하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 몸들은 자신이 지닌 활력을 먹고 살기 위한 노동력으로 전환하는 방식에 사로잡혀 있으며, 말없이 우는 일에 익숙하다. 이세기의 시는 이 육체들이 못다 토해낸 울음을 대신 운다. 아니, 운다는 표현보다는 기억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시인은 그 울음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듯이 흐지부지 사라지는 일상과는 질적으로 다른 정지된 시간 속에 그것을 붙잡아 매어 놓는다. 노동으로 경직된 육체를 지닐 필요가 없는 자들이 저 울음을 세상을 것으로 기억되지 않게 지워낼 때, 이세기는 일상 속에 사장되어 가는 그것을 복원한다. 그리하여 언 손의 시편들에는 절망스럽고도 슬픈 현실의 모습이 제 자신의 무게를 잃지 않고 현재를 구성하는 일부로서 오롯이 자리한다. 이런 면에서 이세기의 시에서 비워내기란 현실을 가상을 비워내고 보다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전하기 위한 시적 방법의 일종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세기의 시가 비워낸 자리에는 종종 모호하면서도 예측 불가능한 자연물들이 섬광처럼 출현한다. “달빛”과 “햇빛” 또는 “갈매기”나 “쇠박새” 그리고 “박꽃”과 “칸나” 같은 자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시 속의 침묵과 슬픔 속에 침입하여 자리를 환하게 비추거나, 경쾌한 움직임을 들여놓거나, 막연한 기다림의 분위기를 발생하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는 현실 속에 예측할 수 없는 사건과 비논리적이면서도 지속성을 동반한 충동적 희망이 내재되어 있다는 시인의 믿음이 남겨놓은 흔적일 것이다. 시인은 「봄밤」에서 김수영의 말을 빌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고 적은 적이 있는데, 저 말을 이세기 식으로 달리 읽자면, 아프고도 절망적인 현실을 기억하는 방식의 시쓰기가 현실 속에 내재한 희망의 가동을 촉진시키는 소리로 작용을 불러온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언 손의 시편들은 과장 없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인의 시적 지향을 묵묵히 따라간다. 그의 목소리가 이렇게 일정한 톤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시가 내기를 건 희망이란 “달빛”과 “햇빛”처럼 우리의 주변에 늘 서성이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현실 속에 강렬하게 기입됨으로써 현실적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시간의 기다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가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시가 자주 “온다”라는 술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시인이 꾸는 꿈이 쉽사리 도래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징표인 셈이다. 어쩌면 저 기다림의 미학이야말로 이세기 시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기원을 덧붙인다. 세상의 언 몸들을 어루만지기 위해 끊임없이 얼어붙을 시인의 손이 끝끝내 뜨거운 언 손으로 남아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