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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라는 신세계 - 『인어소녀』
그림책이라는 신세계 - 『인어소녀』
(데이비드 위즈너 그림. 도나 조 나폴리 글. 심연희 옮김. 보물창고 펴냄)
푸른 바닷물에 해초더미가 일렁이고 청어가 헤엄친다. 맑고 푸른 눈의 소녀가 청어를 쓰다듬으며 물끄러미 독자를 바라본다. 노련하고 지혜로워 보이는 커다란 문어는 주름진 눈가를 찌푸리며 이 모든 상황을 잔뜩 경계하는 표정으로 버티고 앉아있다. 미묘하게 수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래픽 노블 『인어소녀』의 표지다. 이 책의 원제는 ‘Fish Girl’로 2017년에 출간된 작품이다.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면 아직 생소하게 여기는 독자가 많은 우리나라에도 비교적 빠르게 번역 출간되었다. 그림을 그린 데이비드 위즈너와 글을 쓴 도나 조 나폴리의 명성에 힘입은 바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굳이 작가들의 지명도가 아니어도 충분히 화제가 될 만한 걸작이다. 방파제를 위협하며 출렁이는 바닷물처럼 격렬한 그림은 이 소녀의 절박한 운명을 감춤 없이 드러낸다. 독자는 책을 펴들자마자 심상치 않은 상황을 감지하고 숨 돌릴 틈 없이 이야기에 빠져든다.
데이비드 위즈너는 1992년, 2002년, 2007년에 세 번이나 칼데콧 대상을 수상했으며 칼데콧 아너상에도 세 번이나 이름을 올린 바 있는 당대 최고의 그림책 작가다. 화려한 경력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여전히 그가 전작을 압도하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으며 그러한 실험을 통해 가장 현재적이면서도 매력적인 서사와 이미지 속으로 독자를 데려간다는 점이다. 이 책도 그렇다. 『인어소녀』는 그동안 그림책만 그려왔던 데이비드 위즈너가 처음으로 시도한 그래픽 노블이다. “화가로서 성장하기 위해서 늘 낯선 영역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고 말하는 그는 수백 컷의 그림을 통해서 또 하나의 생소한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
침묵 속에 동이 트는 새벽 바다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노을이 지고 둥근달이 뜨는 한밤 중 수평선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주인공인 인어소녀 미라는 친구 리비아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어디에서 온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거대한 수족관 ‘오션 원더스’ 안에서만 살아왔다. 오션 원더스의 주인이자 조련사인 넵튠은 자신이 포획해서 여기에 가두어 둔 모든 해양 생명체들을 향해 강력한 신처럼 군림하며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른다. 인어소녀는 유료 수족관인 오션 원더스를 흥행시키는 가장 신비스러운 존재다. 관람객들은 넵튠의 공연에 열광하면서 사람인지 물고기인지 알 수 없는 인어소녀를 잠시라도 만나보기 위해서 꾸준히 오션 원더스를 찾는다.
어느날 오션 원더스를 찾은 소녀 관람객 리비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수족관의 금지 구역에 들어섰다가 인어소녀와 마주치면서 이야기는 긴박하게 전개된다. 넵튠이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고 굳게 믿던 인어소녀는 넵튠의 거대한 힘을 두려워하고 바깥에 나가면 실험실의 희생양이 되고 말 것이라는 그의 협박에 두려워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살아왔다. 넵튠은 “너는 내 거야. 내 보물이지. 나는 널 사랑하는 사람이야.”라고 끊임없이 인어소녀를 세뇌시킨다. 그런데 인간 세상에서 온 또래 친구 리비아와 만나고 그 리비아의 도움을 받아 금지된 규칙을 깨뜨리면서 인어소녀는 서서히 자신이 가진 아름다움과 독립적인 존엄함을 깨닫는다. 리비아는 “물 밖으로 나와본 적이 있느냐?”는 말로 인어소녀의 마음을 뒤흔들어놓으며 친구가 되자고 말한다. 인어소녀에게 기적이라는 뜻의 ‘미라클’에서 딴 ‘미라’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리비아다. 인어소녀 미라의 자아 탐색을 위한 도전은 시작되고 인어소녀를 가두어둔 채 자신의 사업을 번창시키려는 넵튠의 계획은 미라와 리비아의 움직임 앞에서 위기를 맞이한다.
이 책에서 넵튠과 인어소녀 미라의 관계는 일반적으로는 잘 이해되지 않는 의아한 상태다. 인어소녀는 넵튠의 부당한 감금 명령에도 불만을 가지지 않고 순순히 따른다. 이와 비슷한 관계를 우리는 최근 아동청소년 성폭행 사건에서 자주 발견한다. 아동청소년에게 성범죄를 저지르는 가해자들의 예비 행위를 가리키는 용어 중에 ‘그루밍(Grooming)’이라는 말이 있다. 잠재적 가해자가 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아동이나 청소년과 친밀한 관계를 만드는 수법을 말한다. 그루밍(Grooming)의 어원은 ‘다듬다, 길들이다’라는 뜻이다. 그루밍을 시도하는 가해자들은 범죄의 피해자가 이후에 고발하거나 탈출하지 않도록 굳건한 신뢰 관계를 형성해 성적 학대가 쉽게 이뤄지도록 만든다. 학대가 시작된 뒤에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가해자의 위력에 기대어 벌이는 지속적인 모든 행위를 그루밍이라고 부른다. 주로 취약한 환경에 놓인 아동이나 청소년에게 접근해 신뢰를 얻은 다음 성적 학대를 시작하며, 이후로는 그 믿음을 이용한 회유나 협박을 통해 폭로를 막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루밍은 아동·청소년 대상 성폭력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특히 학대가 일어나기 전에 피해자와 신뢰·지배 관계를 형성한다는 점에서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인어소녀 미라도 조련사 넵튠으로부터 그루밍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감금된 채 철저하게 이용당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루밍의 가해자들은 착취할 대상을 선정한 뒤, 오랜 기간 친절하게 대해주며 피해자를 길들인다. 피해자는 이 과정을 통해 가해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신뢰하게 된다. 특히 인정과 애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큰 아동이나 청소년들은 그루밍을 거치며 가해자와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루밍을 통한 착취의 가장 큰 문제는 신뢰를 바탕으로 학대가 진행된다는 점이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호감을 느끼거나 신뢰하고 있어 스스로 학대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리비아가 나타나 미라의 착각을 깨뜨려주지 않았더라면 미라는 자신도 혼자서 일어설 수 있는 당당한 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영원히 오션 원더스에 갇혀서 넵튠의 폭력에 의해 희생되는 삶을 살아가야 할 수도 있었다.
이 작품에서는 또 다른 범죄적 행위의 특징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다. 가스라이팅이란 상황을 조작하는 등의 방식으로 타인의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행위를 말한다. 1938년 영국에서 상연된 연극 ‘가스등’에서 유래된 말로 연인이나 가족 등 친밀한 관계에서 주로 나타난다. 가해자는 거짓말과 비난 등을 통해서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 가치와 판단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피해자는 반복적인 가스라이팅을 겪으면서 고립된 상태에서 가해자에게 복종하게 된다. 『인어소녀』에서 넵튠의 행동은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이지만 미라는 아저씨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면서 그가 자신을 가두어둔 폐쇄된 공간조차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고 믿는다. 미라가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으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는 ‘난 알아야겠어,’라는 다짐과 용기다. 그리고 그 용기를 불러일으킨 것은 리비아와 나눈 우정이다.
이 그래픽노블은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통렬한 방식으로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의 실체에 대해서 알려준다. 최근 아동청소년을 향한 성범죄가 급증하고 있고 그 가해자들의 대부분이 넵튠처럼 피해자를 길들여 왔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작가 도나 조 나폴리는 오랫동안 신화와 민담을 연구해온 언어학자로서 인간 심성의 나약한 지점을 공략하는 범죄자들의 폭력적 행동과 그 안에 갇힌 피해자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려냈다. 그는 이 이야기를 그래픽노블이라는 이야기 방식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 데이비드 위즈너의 그림 덕분에 자신이 전하는 언어의 한계가 극복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데이비드 위즈너의 그림은 그만큼 탁월하다. 인어소녀가 실체를 자각하고 난 뒤에 일으키는 대반전 장면에서 독자는 통쾌하고 폭발적인 이미지와 만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구조를 기다리는 인어소녀 미라와 같은 아동청소년들이 있다. 그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리비아가 했던 것과 같은 적극적인 연대와 구조의 손길이라는 것을 이 책은 일러준다. 신화적 상상 속의 인어소녀 이야기로만 짐작했던 독자들이 있다면 이 작품을 숙독하는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폭력의 실체를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리비아와 미라의 연대가 그들의 삶을 푸른 하늘 아래로 끌어올리는 과정은 감동적이다.
* 인어소녀 작가 동영상 https://it-it.facebook.com/nytbooks/videos/live-illustration-david-wiesner/1542593152437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