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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등록일 2019.09.20 / 작성자 정*준 / 조회수 1463  

<교수 서평 문예학부 정용준>



상냥한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누군가 내게 한국소설에서 유머를 담당하는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세 명을 말하겠다. 정영문. 이기호. 그리고 윤성희. 세 작가의 유머 코드는 다 다르다. 결도 다르고 느낌이나 뉘앙스도 다르다. 윤성희 식 유머만 놓고 말해보자면 우선 엉뚱하다. 이야기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흘러가거나 인물이 뜬금없는 행동을 하기도 하고 느닷없는 말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첫 문장』에서는 자신의 마음과 의도와 다르게 오해받는 인물이 나온다. 작은 우연과 어긋남이 엉뚱한 사건을 만들고 그 사건 속에서 인물은 엉뚱한 결심을 하고 엉뚱한 말을 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론 예상치 못한 이런 변화는 중심서사의 방향을 크게 변화시키거나 인물에게 커다란 전환기나 각성의 기회로 삼기 마련이다. 하지만 윤성희 소설에서는 중심서사의 변화라기 보다 중심에서 빗겨난 아기자기하고 시시콜콜한 엉뚱함이 있다. 엇, 하고 웃음이 터지거나 흐뭇하게 미소를 짓게 만들거나 읽을 땐 별 느낌이 없었다가 다 읽고나서 그 장면이 떠올랄 마음이 이상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지점은 재미있다, 보다는 유머있다, 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상냥한 사람』은 슬픈 소설이었다. 


상냥한 사람은 좋은 사람일까?
 


윤성희 소설은 항상 웃음과 슬픔이 반씩 섞여 있는데 이 책은 슬픔이 훨씬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상냥하다는 말을 더 이상 상냥하게만 생각할 수 없게 됐다. 어쩌면 나는 앞으로 상냥하다는 말에 쓸쓸함을 먼저 느끼는 사람으로 변했는지도 모른다. 상냥한 사람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 다 슬픈 사람들처럼 느껴졌다. 충분히 착한데 더 착하려고 애쓰다가 망가지거나 혹은 죽음에 이르는 사람들. 이를 테면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아 미안하다는 소설 속 사회자 같은.


처음에는 잠을 자는 줄 알았다고 관리인은 말했다. 책상 위에는 유서가 놓여 있었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잘 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민은 유서를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시옷을 다른 자음보다 크게 썼는데 그래서인지 사람이라는 글자가 튀어나와 보였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나는 독서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감정이 격해지고 마음이 요동쳐서 차분하게 글자에 시선을 두고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반쯤은 슬프고 반쯤은 화가 났던 것 같다. 왜 괜찮은 사람은 자기가 괜찮지 않다고 생각하는 걸까. 일생을 다른 사람보다 괜찮게 살아와 놓고 아직도 자기는 멀었다고 자기는 죄가 많고 잘못이 많다고 생각하는 걸까. 늘 미안해하고 반성하고 회개하다가 마침내 자신은 실패했다고 생각해버리는 걸까. 괜찮아져야 하는 안 괜찮은 사람은 저렇게 멀쩡하게, 함부로, 마구마구, 저 따위로, 뻔뻔하게 잘 살고 있는대. 


윤성희의 소설을 생각하면 페터 회의 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의 한 구절이 자동으로 연상된다.


 나는 항상 패배자들에 대해서는 마음이 약하다. 환자, 외국인, 반에서 뚱뚱한 남자애, 아무도 춤추자고 하지 않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 심장이 뛴다. 어떤 면에서는 나도 영원히 그들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항상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어떤 소설가들은 패배자들과 약자들에 관심이 많다. 심지어 자신의 패배와 약함에도 관심이 많다. (그동안 읽었던 수 많은 소설의 주인공과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잘 먹고 잘 살고 원하는 대로 꿈을 이뤄 성공한 소위 잘 나가는 인물은 손에 꼽는다. 있더라도 내면이 무너져 있거나 자기도 모르게 뭔가를 잃어버린 인물일 것이다) 역사는 성공하고 승리하는 이들의 기록이다. 끊임없이 사회는 성공한 자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들을 계몽하고 멘토링하려 한다. 하지만 문학적 판단은 윤리적 판단과 다르다. 인간을 인간답게 설명하는 논리와 표현도 사회가 말하는 가치와는 다르다. 어떤 소설가의 눈은 패배자를 향해 있다. 인간의 얼굴에서 실패의 표정과 절망의 빛을 발견해낸다. 감춰둔 마음과 하지 않은 말에 관심이 있고 무표정을 연기하는 미세한 표정의 언어를 감지해내는 감각을 갖고 있다. 그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혼자 걷는 길과 혼자 먹는 밥과 그의 웃음과 그의 울음과 혼잣말 같은 것들을 상상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사건의 전후사정을 생각한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되었는지, 왜 그때 참고, 왜 이땐 참을 수 없었는지를, 헤아려보곤 한다. 그것에 관해 고민하고 생각하느라 마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리고 천천히 한 문장씩 한 장면씩 글로 옮기고 더 정확한 표현과 단어를 찾기 위해 다음 문장 앞에서 서성이기도 한다. 윤성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런 풍경이 떠오른다. 소설과 소설을 쓰는 작가의 마음도 함께 느껴진다.


나는 윤성희의 이야기가 좋다. 다른 여러 좋은 점 중에 이야기가 최고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야기 뒤에 더해지는 ‘윤성희식’ 환하고 희망적인 이야기가 좋다. ‘환하고 희망적인’ 이 표현을 쓸까 말까 고민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환하지만 어둡고 희망적이지만 절망적인 이야기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상냥한 사람』에서도 그 점이 유감없이 보인다. 읽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내가 말한 그 환함과 희망이 무엇인지. 언뜻 보면 에필로그 같기도 하고 엔딩크레딧 이후에 등장하는 쿠키 영상 같은 이야기가 소설 중간 중간에 등장하는데 그것이 너무 좋다. 그 이야기로 인해 중심서사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위로를 받는다. 평범하고 상냥한 겁쟁이 같은 인물들에게 작은 빛을 비춰주고 격려를 해준다. 심지어 그들에게 두 번째 삶을 선물하기까지 한다. 내 책의 작가의 말에서도 썼지만 나는 소설의 힘을 믿는다. 그 힘이 변화를 이끌어내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고도 믿는다. 


『상냥한 사람』을 다 읽고 이런저런 날들이 지났지만 느닷없이 떠오르는 한 줄의 문장이 있다. 그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마음이 쓸쓸해지고 마는데 그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규칙을 정한 것은 아닌데 마지막 문장은 늘 슬펐어,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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