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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결국은 또 허구다 - 최정나, 「말 좀 끊지 말아줄래?」」, 『말 좀 끊지 말아줄래?』

등록일 2019.07.17 / 작성자 함*진 / 조회수 125  

결국은 또 허구다
- 최정나, 「말 좀 끊지 말아줄래?」, 『말 좀 끊지 말아줄래?』 

 

함유진

 

 

뛰쳐나가는 어린아이


 작품의 시작은 어떤 한 소년이 울면서 장례식장을 뛰쳐나오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이 소년을 목격한 장례식장에 모여있던 사람들, 즉 조문객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보니 “조문객들은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바라보면서도 소리에 질려 인상을 찌푸리거나 양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아 씨, 시끄러워, 왜 저래, 몰라, 어쩌라고 등과 같은 말을 토해냈다.”(9p)

 조문객(弔問客)이란 ‘남의 죽음에 대하여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어 상주(喪主)를 위로하러 온 사람’이라고 사전에 정의되어 있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상주를 위로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우는 소년을 보며 짜증을 내는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이 장면에서 최정나의 『말 좀 끊이 말아줄래?』에 수록된 단편이 하나 연상되어 떠오른다.
 「한밤의 손님들」에서는 가식적인 어른들의 대화 사이에 앉아있던 소년이 식당을 박차고 뛰쳐나간다. 한 손에는 휴대전화의 플래시를 켠 채 너무 환한 빛에도, 어두운 어둠에도 삼켜지지 않은 채 어디로 갈지 모르는 상태로 밤거리를 달려나간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소년은 어른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감정을 드러내며 가식적인 공간을 벗어나 뛰쳐나간다.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러 왔지만 고인이 무엇 때문에 돌아가셨는지조차 모르는 가식과 겉치레만이 존재하는 곳에서 아직 빛에도 어둠에도 삼켜지지 않은 어린아이만이 최정나가 보여주는 실낱같은 희망인 셈이다.

 어린아이가 이렇게 순수하게 슬픔을 드러내는 동안 어른들은 이런 아이를 보며 “의례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전부다.(18p) 너무 성의 없어 보인다거나 너무 눈에 훤히 드러나 보인다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애초에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침통하게 앉아있다가 조심스레 근간의 이야기를 꺼”내고, “그런 다음 목소리를 높”이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그렇지, 왜 아냐? 맞장구치다가 이내 설전을 벌이기도” 하기 위해 온 게 다이니까.(17p) 의례적인 걱정이나 안부로서 그들이 해야 할 과제는 전부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정말 애통하고 비통해서 눈물이” 난다는 말이면 의심의 눈초리에서 벗어나 평범한 조문객으로 입장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갖춰지는 셈이다.(15p) 어차피 “우리는 배운 대로 말”한다.(19p)

 

배움과 지식

 우 씨와 이 씨의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있어 보자. 얼핏 보기에 지적으로 보이는 말투를 구사하며 언뜻 어려운 말들을 유식하게 해보이는 것 같아보이는 이 남자가 하는 “유익한 대화”는 사실은 쓸 데 없는 것들 투성이다. 자기자랑에 취해있는 이 남자가 살아는 동안 독일이 독어로 도이칠란트라는 것이나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지식을 써먹을 데가 어디 있었을까. 그럼에도 이 남자가 이토록 쓸 데 없는 말들을 나불대며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려는 건 결국 “우리는 배운 대로 말”하기 때문이다.

 작중에서 지식과 관련지어 선생으로 불리는 인물이 등장한다. 고인으로 등장하는 이 인물은 제자들에게 지식을 남기고 가르침을 전파했다. 식장에 모인 제자들이 고인을 추억하며 고인의 말과 가르침을 남기고자 기록한 영상에는 선생의 말 대신 그럴듯하고 있어 보이는 풍경이 연속해서 이어지는 화면이 다다.(29p) 선생의 지식, 선생의 말씀, 정작 선생이 무슨 가르침을 남겼는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소설을 통해 알 수 있는 영상에 기록된 선생의 가르침은 그저 겉보기에 아름다워 보이는 화면과 이제는 고인이 된 선생을 위해 슬퍼하는 모습 뿐이다. 결국에 “우리”가 “배운” 것이란 그런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슬퍼하는 모습 밖에 무엇이 더 있을까. 선생을 추모하는 영상을 보며 적당히 슬퍼하고 상대와 대화를 나누고 휴대전화의 문자메시지 알림음이 들리는 이 광경(30p)이야말로 완벽한 “배운 대로”의 추모의 모습이 아닌가.
 장례식장에서 급조된 “진정한 친구”(37p)는 오늘이 지나면 굳이 다시 재결합 하지는 않을 것같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모르는 척 즐겁게 구현되는 이 허구의 공간은 장례식장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사내에 의해 폭로된다. 겉치레로 구현된 이 장례식장을 돌며 전문적으로 음식을 훔치는 거지나 고인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웃고 떠드는 이 씨와 우 씨가 무슨 차이가 있겠나. 결국 또 “배운 대로”다.

 

죽은 자는 이름이 없다.

 

 작중에서 등장하는 이 선생의 이름 또한 가식적이기 그지없다. “익명호. 향로에 향을 꽂은 사내가 위패를 보고 중얼거리듯 말했다.”(15p) 고인의 이름은 ‘익명’호다. 그야말로 죽은 사람은 이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에 걸맞게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사람 중 고인이 돌아가신 이유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는 친척인 조씨조차도 자세히는 모른단다.(18p) 어차피 고인이 누구든지 간에 여기 모인 사람들한테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조문객들이 이날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인을 추모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이기 때문에 고인의 이름이나 사인쯤 모르는 게 뭐 그리 대수일까. 여기에 한술 더 떠 우 씨와 이 씨는 고인이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채로 장례식장에 참석했다. 이들은 그저 고인의 조카인지 손자인지 모를 조 씨를 만나러 온 거다. 만남의 장소를 마련했다. 고인의 역할로 그거면 됐지 뭐가 더 필요할까.

 

일회성 쓰레기

 

 “자네 눈에는 저것이 꽃으로 보이나? 꽃이 그럼 꽃이지, 꽃이 아니면 뭐란 말이에요? 내 눈에는 우리가 치워야 할 쓰레기로 보이는데, 공장에서 나온 폐기물처럼 죄다 똑같지 않은가?”(11p)

 바닥에 떨어진 조화는 그걸 치워야 하는 사람이 보기에 그냥 쓰레기다. 겉치레를 차리기 위해서 배달된 조화는 식이 끝나면 쓰레기가 되고, 잠깐의 추모를 위해 모였다 사라질 사람들 역시 그럼 무엇일까. 오물을 수거하던 집게는 조문객들의 신발을 정리한다.(13p) 오고 빠지는 빽빽한 사람들의 신발은 대형을 이루어 기계처럼 정확하고 신속하게 정리된다. 그 후에는 또 똑같다. “배운 대로” 겉치레로 이루어진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반갑게 시끌벅적 떠들다가 잘 먹고 잘 떠나는 것이다. “진정한 친구”(37p) 운운하며 신나게 떠들어대던 것도 마찬가지다. 과연 이들이 장례식이 끝난 후에 다시 사업 이야기를 꺼내기는 할까.

 꽃인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쓰레기였던 조화처럼,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 그려진 천장처럼, 물이 없는 모형 분수대처럼(42p) 결국은 다 가짜로 구현된 것들이다. 짐짓 애통하고 비통한 척 슬픔을 담아 짓는 표정도, 진정한 친구처럼 웃고 떠들던 것들도 전부 고인이 마련해준 만남의 장에서 일회성으로 벌어지는 것들이다. 식이 끝나면 연극이 끝나버린 것처럼 전부 없었던 일이 될 것들. 직원은 식이 끝나고 남은 것들을 쓰레기라 부르며 치워야 할 뿐이다.

 

말 좀 끊지 말아줄래?

 

 이 씨와 우 씨, 작중에서 등장하는 이 두 이물을 살펴보자. 어쩌면 이름도 이 씨와 우 씨다. 이름부터 짜증과 불평이 가득한 이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조차도 아주 가관이다. 자기 자랑하기에 바쁜 이 씨와 영 대화의 문맥을 잡지 못하는 우 씨. 여기에 조 씨까지 가세해 대화를 나누려니 도저히 서로의 말을 들어주질 않는다. 단순히 자기 얘기가 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제대로 된 대화가 이루어질 리가 있나. 이들이 나누는 대화를 요약하자면 단순히 이 말 한마디로 줄일 수 있을 것 같다. “말하는데 자꾸 말 끊지 말아줄래?”(24p) 고인의 생전 가르침이 담긴 영상을 보며 슬퍼하는 동시에 옆 사람과 대화하듯(30p) 그들은 적당히 이 일회성의 만남의 자리를 즐기고 있는 것 뿐이다.
 나란히 앉아 입을 우물거리며 과자를 나눠 먹는 소녀들처럼(34p) 나란히 앉아 적당히 적당한 말들을 아무렇게나 나누고 있다. 나쁠 게 뭐가 있나.

 뒤에 나오는 이 적당한 말들은 좀 더 살펴보자. 이들이 하는 말들은 갈수록 아주 가관이다. 전자담배가 몸에 좋지 않아 대신 요새 인기라는 쑥 맛이 나는 담배에 대해 이야기하거나(32p) 장례식장에서 혀를 놀리는 것은 결례이기 때문에 침 대신 물을 써서 담배를 마는 꼴이라니(31p) 허례허식의 끝장을 달리고 있다. 애초에 우선이 되는 문제는 제쳐두고 겉으로 보이는 것만 해결되니 “아무 문제도 아니”(31p)라고 결론지어 버리고 있는 꼴이다.

 가짜의 겉치레로 구현된 허구의 공간을 지나쳐 아직 어린 소년이 존재하는 바깥으로 빠져나온 이들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린 소년처럼 순수하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도, 어두운 공간에서 플래시를 비춰 어둠에도, 빛에도 삼켜지지 않을 재간도 없는 어른들은 그저 원래 있던 가짜 공간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들은 그렇게 가식으로 만들어진 허구의 “복도를 통과해 다시 장례식장 앞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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