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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팬

등록일 2019.05.03 / 작성자 황*미 / 조회수 1520  

2019 교수 서평단 _문예학부 황선미교수   

 

피터 팬 JAMES MATTHEW BARRIE (1860~1937) 

- 일곱 살, 문이 닫혀버렸다

 

피터 팬은 행복한 소년일까.  

모험과 환상 가득한 네버랜드에서 시간을 초월해 살아가는 이 어린 왕자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에 만난 피터 팬은 낭만적이었다. 어린애에게 불필요하다 싶은 부분들을 적절히 덜어낸 축약본인지라 읽기에 어려움이 없었고 요정과 하늘을 나는 피터 팬 만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요정 가루를 묻히고 피터 팬 옆에서 날고 있는 웬디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아주 잠깐이었지만,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은 건 내가 외국 아이로 태어나지 못한 탓인 줄 알았다.

다시 만난 피터 팬은 그때와 다른 인상이었다. 어른의 잔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행복하기만 할 것 같던 소년에게서 좌절과 슬픔이 감지된다. 그 배경에 작가의 아동기가 교묘하게 스며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막연하던 환상이 무너지며 우울하고 깊은 인상이 새로이 남았다.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 동상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모르고 지나칠 만큼 작은 모양이다. 그러나 자신을 알리기라도 하듯 나팔을 쳐들고 있는 모습이 아주 당당하고 아이들이 만졌음직한 높이까지는 인기를 증명하듯 반질반질하다. 응어리진 내면의 형상이 아이들의 환상을 자극하며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줄 제임스 매튜 배리는 그때 알았을까.

 

J.M 배리는 스코틀랜드의 키리뮤어에서 직조공인 데이비드 배리와 마가릿 오길비의 아홉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삼 년 후 태어난 여동생까지 아이가 모두 열 명이나 되는 집에서 배리는 셋째 아들이었다. 첫째 아들 알렉산더는 동생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만큼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는 존재였고, 어머니가 유난히 사랑했던 둘째 아들 데이비드는 열네 살 생일을 앞두고 사고로 죽었다.

배리와 일곱 살 차이가 났던 데이비드의 죽음은 형과의 기억조차 희미했던 배리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작품에 그늘을 드리우게 되는데, 이 원인을 충격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어머니의 무기력증과 보호와 사랑이 간절했던 일곱 살짜리 어린애의 간극에서 찾는 견해가 많다. “나는 어머니가 데이비드 형을 잊을 수 있도록 어머니의 침대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그건 내가 교묘히 의사 노릇을 하는 것과 같았다는 배리의 고백에서 우리가 아는 주인공 피터 팬의 탄생을 짐작하기에 무리는 없어 보인다.

우리는 피터 팬을 어떤 경로로 알고 이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생각해 보았을까. ‘영원한 소년’, ‘자라지 않는 소년’, ‘ 피터 팬 증후군’, ‘네버랜드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거의 일상어에 가깝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이이나 연극, TV 각색 편, 광고 카피, 혹은 <후크 Hook, 1991> 영화가 이 특별한 소년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종의 코드가 돼버린 피터 팬에 비해 제임스 매튜 배리나 원작 피터와 웬디 Peter and Wendy 1911는 그리 일반적이지도 익숙하지도 않다. 원작에 앞서 작은 흰 새 The Little White Bird 1902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 1906이 있었고 원작 소설 외에도 희곡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 The Boy Who Would Not Grow Up 1904이 있다는 사실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 편이고 어쩌면 그다지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별난 소년이 특이한 경력을 가진 작가의 상상력에서 탄생했고, 이 상상력이 상실과 좌절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피터 팬과 배리의 관계에 대해 일부 비평가들은 우호적이지 않다. 배리와 어머니 사이의 불안정한 관계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양상 혹은 소아성애 성향으로까지 평가를 내리곤 하는데, 작품과 작가의 상관관계에 대한 악의적인 판단이야 흔한 일이고 그들만의 견해로 흘려버릴지라도 작품 속 어린 엄마(웬디)에 대한 감상이 불편하게 남는다. 어린 여자애들이 소꿉놀이에서 엄마 노릇을 하며 어른 세계를 흉내 내거나 그럴 듯한 연기를 질서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자의적이고 즐거운선택일 때 인정할 만한 아동기 특성이다. 네버랜드의 웬디가 얼핏 그런 행위 중인 것처럼 보이지만 경계가 아슬아슬하다. 작품 엔딩에서조차 성인이 된 여성이 더 이상 네버랜드에 갈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일반적인 여성의 심리 안에서 과연 인정할 만한 일일까. 배리의 성장기와 켄싱턴 공원에서 만난 데이비스 가족과의 사회적 관계를 놓고 보면 의문이 다소 풀린다. 피터 팬 속에서 인간 배리의 왜곡된 아동기가 감지된다. 배리가 의도했든 아니든 웬디에게는 어린 배리가 욕망했던 어머니 혹은 여성에 대한 환상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웬디는 피터 팬의 엄마이자 아내였을 뿐 아니라 네버랜드에 사는 남자애들의 엄마라야 했다. 청소하고, 이부자리 봐주고, 바느질하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 불러주고, 먹을 것 챙기고, 온갖 투정을 다 받아준다. 자상하고 희생적인 엄마. 춤 춰 달라고 보채는 아이에게 할 일이 산더미 같다고 말할 만큼 바쁜데 여전히 사랑스럽다. 아무래도 이를 즐거운 상상이나 즐거운 내적 동기로 인정하기가 불편하다. 아이의 순수하고 환상적인행위라기보다 그러기를 바라는 프레임이 견고하게 들어가 있다는 인상이다. 웬디가 달링스 부부의 맏이로서 두 동생을 챙기는 입장이라 책임감이 강했다고 해도 말이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순수한 아이는 싫으면 싫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할 줄 안다. 더 이상 재미가 없으면 그만두는 게 아이들이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늘 낯선 세계에 시선을 빼앗기는 존재다. 허나 웬디는 네버랜드에서 오로지 엄마 역할일 뿐 아이답게 순수한 호기심을 따라 스스로 움직인 적이 없다. 건방지고 남자답고 해적들을 무자비하게 해치울 수 있는 강한 피터 팬의 영역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러한 피터 팬이 때때로 아기처럼 굴면 웬디는 곧바로 엄마가 된다.

작품 주인공이 작가 의도로 만들어지고 웬디가 다만 그런 설정의 인물이라고 인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과정에서 작가의 가치관이 반영되는 일 또한 자연스러워서 웬디의 행위는 배리가 바라는 여성과 엄마에 다름 아님을 짐작할 근거다 된다. 해적들과 후크조차 바로 이런 이유로 웬디를 훔쳐오고 싶어 한다. 대치 관계의 두 남성 사이에는 자애롭고 희생적인 엄마가 있을 뿐 순수한 아이는 없다.

배리는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시기에 사고로 죽은 형에게 엄마를 빼앗긴다. 실제로 형처럼 보이고 싶어 노력했다는 일화가 엄마에 대한 갈망이 얼마나 절실했는가를 말해준다. 피터 팬의 탄생은 애초에 엄마와의 관계 불능, 좌절에서 비롯되었다. 안타까운 사연이 매력적인 이야기로 탄생했으니 배리는 탁월한 이야기꾼이 분명하다. 피터 팬 탄생의 구체적 계기는 사실 배리 부부가 켄싱턴 공원에 산책을 다니며 관계를 맺은 데이비스 가족 덕분이었다. 아서 데이비스 부부와 그의 아이들. 피터는 그들 형제 중 막내였는데 배리는 이들 가족과 평생에 걸친 사회적 관계를 유지했고 아서가 죽은 뒤에도 데이비스 부인과 성인이 된 자녀들이 죽을 때까지 보호자로서 정성을 다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배리가 데이비스 부인을 이상적인 여성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데이비스 부인의 지성과 자애로운 어머니 모습은 작품 속 달링스 부인과 겹친다.

실제로 배리는 성장을 멈춘 소년처럼 키가 150센티 남짓이었다고 한다. 사회적인 남성의 역할과 성적인 남성에 불안감이 있었고 그의 슬하에는 아이도 없다. 데이비스 가족을 만날 때 이미 작가로서의 명성이 높아서 유명인들과의 교류가 상당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아동기의 좌절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어머니에 관한 글 마거릿 오길비에 여실히 드러나고 작은 흰 새 1902, 켄싱턴 공원의 피터 팬 1906, 피터와 웬디 1911로 이어지는 수정 작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아동기의 상처가 성인의 평생에 영향을 미치는 근거는 심리 전문가들의 진단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배리의 경우에는 시간 개념이 없는 네버랜드에서 놀다가 불현 듯 나타난 피터 팬이 성인이 된 웬디를 알아보지 못하고 웬디의 딸을 데려가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웬디는 나이를 먹을수록 자신이 겪은 한 시기의 환상을 잊어버리는데 어쩐지 이 느낌은 웬디 어머니 달링스 부인이 보였던 반응과 흡사하다. 어머니로부터 채워지지 않은 욕망은 평생 반복된다는 상징일까.

배리는 이외에도 연극 상연 대본 자라지 않는 소년, 피터 팬 1904과 무성영화 시나리오 피터 팬 1926뿐 아니라 데이비스 형제들과의 만남을 기리는 작품을 집필하기도 했으니 이 가족과의 사회적 관계가 배리에게 진짜 가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장이 멈춘 남자에게 데이비스 가족을 위한 관심과 헌신은 어머니의 치료자이기를 원했던 배리의 최선이었을 것이다.

피터 팬은 몇 살이나 먹은 소년일까. 어머니의 창문에서 떨어져 네버랜드에 갔고, 신 나게 놀다 돌아가도 어머니가 기다려 줄 것이라 믿었으나 어머니의 창문은 닫혀버렸다. 어머니에게는 이미 다른 아기가 있었다. 피터 팬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젖니가 고스란히 남은 아이다. 네버랜드에는 하나같이 엄마를 잃은 아이들, 유모가 한 눈 파는 사이에 유모차에서 떨어진 남자애들이 산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보다 영악해서 유모차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다나. 어머니의 창문이 닫혀버리는 바람에 성장이 멈춘 피터 팬은 제임스 매튜 배리의 아동기 좌절과 욕망이 반영된 놀라운 인물이다. 대개의 어린이가 순수한 감성으로 읽고 환상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 좀 더 깊은 인식으로는 한 사람의 고백을 경험할 수 있는 근거, 때로는 인간의 좌절과 상처라는 기반에 세운 독특하고 놀라운 산물이 아닌가.  

 

피터 팬 

 

 

          문예창작과 황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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