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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전자책]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내가 보는 공간이, 나를 보고 있다 - 편혜영, 「사육장 쪽으로」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던 신동엽의 시를 아직도 기억 한다. 내가 보고 있는 그것이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섬뜩한가. 풍요로운 그것들 옆에는 파산한 것들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 어째서 가혹한가. 개인과 개인이 뚜렷한 차이도 없이, 각자 포장지만 다를 뿐인 공산품처럼 나란히 배열되는 자아들. 내가 보는 도시가, 내가 보는 당신이, 동시에 나를 본다. 거울처럼 나를 비춘다. 다를 것도 없다는 듯이.
「사육장 쪽으로」는 너와 나, 도시와 시골, 아파트와 주택을 서로 마주 서게 한다. 마주 서 있는 공간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구조가 보인다. 짐작도 되지 않는 커다란 구조. 개인은 고속도로에 떠밀린 자동차처럼 그저 내달릴 뿐이다. 길은 끝날 것이라고. 길들여진 개처럼 다시 구조 안에 편입되길 갈망한다.
어항 안에서 허적거리는 물고기나, 감옥 안에 갇힌 죄수처럼 「사육장 쪽으로」에서 개인은 그렇게 무력하지 않다. 그들은 스스로 선택한다. 도시를, 아파트를, 주택을, 빚을, 그 선택의 과정이 다들 비슷하다. 비슷한 풍광의 비슷한 위치에 비슷한 융자를 끼고 비슷하게들 산다. 이 비슷함이 나열되면서 마을이 형성되고 마을은 도시가 된다. 도시는 또 다시 시골로 꼬리를 문다.
이제껏 개인의 초라함과 무력함을 강조해왔던 서사와는 단연 맥락이 다른 대목이었다. 차압 경고장을 잊어버릴 만큼 일상은 기계적으로 돌아가고, 후회할 여유도 없이 기꺼이 빚을 자처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하지도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를 구하려 하지도 않는다. 무심하다고 해석되기엔 집요하리만큼 구조적인 움직임이다.
너무 거대하고 온갖 종류의 벽들로 무장한 이 구조적인 시공간에서 그들은 오히려 서로 똑같아지는 것에 안심한다. 집행인이 언제 들이닥칠지 알 수 없어도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생각을 할 수 있다. 어차피 ‘멀리서 보면 모두 똑같을’ 것이므로. ‘좋은 아이디어라고 해도 무시될 거’란 걸 체험해왔으니까. 그들이 직접 내려야 할 수도 있는 중요한 결정들은 결국 구조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이다.
서사의 모든 부분이 도시와 시골, 개와 인간, 아파트와 주택, 어른과 아이가 ‘벽’으로, ‘울타리’로, ‘파티션’으로 나뉘어져 대비된다. 그러나 아이가 개에게 헐뜯기고, 아버지는 개인지 아이인지 모를 것을 두들겨 패고, 주택단지를 지나 다시 똑같이 생긴 주택단지를 만나는 종착에 이르면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같다는 걸. 거대한 구조 속에서 파산과 풍요가, 나와 당신이, 제조품처럼 ‘똑같아져’ 버렸다는 걸. 출구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고속도로를 지나 다시 구조 안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으리란 걸. 작가는 이에 대한 고발을 위해, 내가 보는 구조가 나를 보게 하기 위해, 이토록 구조적인 서사로 헐뜯고 있는 것이다.
「통조림 공장」이나 「월요 한담」 또한 공간 속의 개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통조림 공장」의 경우 몸이 기계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 오히려 뿌듯해져버린 개인이 등장한다. 상하지 않은 채로 동일한 상태가 지속되는 통조림 같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월요 한담」에는 사랑이나 가족이나 월급보다도 의무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개인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육장 쪽으로」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공간과 공간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려내는 범위의 크기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사육장 쪽으로」는 끊임없이 대비했던 가치들을 마주 서게 하고 그것들을 서로 비추어낸다. ‘모순’에 대하여 이보다 구조적인 서사를 가진 작품이 또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