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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검은 눈동자/ 강성은 시집, [lo-fi]

등록일 2018.11.13 / 작성자 송*원 / 조회수 227  

아는 친구 한명은 외출을 할 때면 웬만해서는 썬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나는 그 또한 멋쟁이인 그녀가 추구하는 스타일일 거라 추측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놀랍게도 그녀는 남들보다 유달리 큰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커다란 검은 눈동자가 빛을 너무 많이 빨아들이기 때문에 썬글라스를 쓰지 않으면 시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남들은 잘 모르는 불편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였지만, 엉뚱하게도 그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간 나는 그녀가 겪는 증상이 그녀가 쓰는 특별한 시와 어딘가 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판을 들고 앉을 자리를 찾는 아이였다

식은 밥과 국을 들고 서 있다가

점심시간이 끝났다

문득 오리너구리는 어쩌다 오리너구리가 된 걸까

오리도 너구리도 아닌데

이런 생각을 하며

긴 복도를 걸었다

교실 문을 열자

아무도 없고

햇볕만 가득한 삼월

 

강성은, Ghost, 󰡔lo-fi󰡕

 

식판이란 말이 어딘가 차갑다. 저 어휘의 어감이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먹는 일을 강요당하는 느낌이 든다면 과장일까. 하지만 말에 예민한 사람이라면 단어에서 색감과 온기를 감지하는 게 당연할 터. 아마도 시인은 부러 식판이라는 말을 골라 써서 시 속의 아이가 겪고 있는 곤란함을 증폭시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아이는 그 차가운 식판을 들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서있다. 세상에는 자신의 자리를 영리하게 빨리 알아채는 사람도 있지만 한편에는 자신의 자리를 어디로 해야 할지 몰라 더딘 사람들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있을 곳을 모른다기보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자리를 선별하기 위해 숙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다. 저 아이가 겪었을 곤란 또한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내가 저 곳에 앉아도 될까’, ‘내가 그곳에 앉아버리면 그 자리에 앉고 싶던 다른 친구가 곤란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종류의 속깊은 고민에 휩싸인 상황 같은 것. 그렇게 시간을 끌다보니 아이는 자기 혼자 외톨이처럼 남았을 것이다. 세상은 그러한 속깊음에 쉽사리 응답해주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런 속깊음은 요령 있게 잊고 빨리 성장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게 바로 냉정한 현실이라는 듯이, 냉정을 과장하여 말하면서.

외톨이처럼 남은 아이가 자문한다. ‘오리너구리 어쩌다 오리너구리가 된 걸까’. 저 질문은 나는 왜 나일까를 질문하는 성숙한 아이의 물음을 감추고 있다. 그러니까, ‘는 왜 대개의 사람들처럼 누군가의 옆자리에 쉽게 앉지 못하는 일까라는 물음이 어린이의 시선을 거쳐 변형되어 탄생한 질문. 아이는 어쩌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재빨리 엉뚱한 질문의 형태로 그것을 바꾸었는지도 모른다. 오리도 너구리도 아닌데 오리너구리가 된 이름처럼, 오리무중인 자신의 무능(?)의 기원에 대한 질문, 실제로는 짧은 복도였을지라도 그런 질문을 하는 과정에 그곳은 하염없이 길어만 졌겠고, 작은 머리가 경험했을 길고 긴 고뇌의 연속, 그리고 교실 문을 열었을 때 인적이 없는 교실에서 그녀를 환하게 맞아준 햇볕!

시인은 어려서부터 커다란 검은 눈동자를 지녔었을까. 엉뚱한 생각이 든다. 혹 저 텅빈 교실에 내리쬐던 삼월의 햇볕을 강렬하게 느낀 그 순간 커다랗게 확장된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영원히 커다란 검은 그것이 된 것은 아닐지. 그때부터 시인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무언가를 계속 보아야만 하는 운명에 휩싸인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 같은 것, 또는 사람의 속 깊은 곳에서 검게 타들어간 마음의 흔적 같은 것.

 

좋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자꾸 나를 먼 곳에 옮겨 놓고 가버린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었지만, 시인은 여전히 세상에서 자신이 차지해야 하는 자리를 재빨리 선점하지 못한다. 게다가 어른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세계와는 달리 그녀의 그러한 약점(?)을 쉽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녀를 자꾸 세상의 먼 곳으로 옮겨 놓는다. 아마도 자신의 이익과 관련한 자리를 하나 더 늘리려는 계략이 거기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눈이 밝은 그녀의 검은 눈동자는 그들을 섣불리 나쁜 사람이라 여기지않는다. 대신에 좋은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예전 학교의 복도보다 한참은 더 길 그 길을 오랫동안 생각하고 생각하며 돌아와 다시 또 생각한다. 마치 그 긴 생각의 색깔처럼 그녀가 먹는 밥과 반찬 또한 하얗고 하얗다.

남의 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만들지 않기 위해 애쓰던 아이는 남의 자리를 함부로 논하는 사람이 아닌 어른으로 자랐다. 저 아이로부터 어른의 시간 동안 수많은 손톱들이 그녀의 삶을 할퀴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와 같은 삶은 우리 주위에 하나씩은 꼭 있기 마련이다. 나는 그것이 세상의 섭리요 또 잔인함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축복이면서 저주 같은 것이라고도. 썬글라스 저편에서 보이지 않는 눈물을 오랫동안 홀로 흘리고 있을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대해 상상하면 그런 생각을 피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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