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메뉴
검색
본문
감각의 박물학
-다이앤 애커먼 지음/백영미 옮김/작가세계(전자책)
이 책에서 알 수 있는 인간의 미묘한 감각은 동물적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해서 감각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좀 다르다. 어떤 충격 속에서 도피하려고 침묵하는 듯한 좀머 씨를 관찰하면서 사색적인 사람을 떠올리는 것은 바로 인간의 의미부여능력을 인정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침묵에 대하여 감각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은 인간에게만 있다. 어떤 사유로 인한 침묵인지를 헤아리기 위해 눈으로 관찰하고, 냄새를 맡고, 주위의 소리를 듣고, 만져보기도 한다. 인간은 그렇게 오감을 통해 대상을 이해하고 설명한다.
감각은 인간으로서 존중받기를 염원하는 본성에서 비롯된다. 감각기관(이하 '감관'이라 표기함.)에서 느끼는 감정들은 매우 솔직하고 직접적이어서 인간을 신뢰하게 만드는 단서로 부족하지 않다. 인간은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감각을 사용한다. 다시 말해 인간이기에 인간다운 능력은 후각, 미각, 촉각, 청각, 시각, 공감각으로 본성에 충실하는 것이다.
누구나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도취되고, 흥겨운 음악을 들으면 어깨를 들썩이며, 맛있는 냄새를 맡으면 침을 삼킨다. 본능적인 감각을 억지로 막는다면 즐거움이나 슬픔 같은 감정에 냉담해져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경험이 극히 적어진다. 그렇게 본능이나 본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너무도 쉽게 외로워진다. 느끼는 바가 같아야 생각이 닮는다는 것은 마땅한 이치다. 서로 닮은 것을 발견할수록 낯선 세상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한 이해는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준다. 의사소통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생각해 보자. 사람은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사람은 생물들 가운데 유일하게 언어를 조작하는 능력을 가졌다. 아니, 다시 말해서 언어는 인간다움을 입증하는 단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감관은 동사와 결합되어 그 기능성을 증명한다. 보살피다, 쓰다듬다, 보다, 엿보다, 주시하다, 엿듣다, 킁킁거리다, 맛보다 등등. 미각을 표현할 때 들리는 소리를 통해서도 욕망이 충족된다. 가령 포테이토 칩의 경우에 바삭바삭 씹히는 소리가 있어야 그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 인간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위해서는 욕망에 충실해야 하는데 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요인이 바로 감관을 헤아리는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감관을 배려할 때 진통을 줄이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람은 어떻게 알게 되는가? 피부에 스치는 정도로도 알 수 있고, 실내에서는 잎이 흔들리는 모양을 보고서도 알 수 있다. 비는 옷이 젖는 것과 함께 빗줄기 형태, 소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인간의 몸으로 느끼는 감각은 신비롭다. 그만큼 예술가에게 감각적 경험은 평생 기억된다고 한다. 특히 유년에는 감각에 민감하고 정서적으로 감동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의식세계가 열려 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 문화적으로 감성을 재단해서 닫아두거나 숨기는 습관이 형성된다. 그래서 비밀이 거짓을 만드는 것이다. 좀머 씨는 그런 시기를 싫어할 테고, 좀머를 좋아하는 어린이 또한 본성에 솔직하고 공감하는 성품이기에 두 사람의 세계는 공유된다. 두 사람의 세계는 언어로 소통되기 때문에 머릿속을 생각할 수 있도록 열어둔다.
인간의 마음을 말이나 행동으로 묘사하는 일에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 눈으로 느끼는 방법 말고도 굳이 ‘언어를 읽고’(50쪽) 언어로 표현하게 하는 것 말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언어를 들으면 몸짓을 보았을 때보다 천천히 이해되는데도 말이다. 그 모습이 두뇌에까지 전달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언어를 읽어내는 동안에도 실제 대상을 그림이나 소리로 변환하여 비슷하게 떠올리지 않는가.
또한 치밀묘사는 한순간에 머릿속에서 작동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사유의 깊이를 증명한다. ‘오른쪽’에 대해 정의하는(70쪽) 것도 상황마다 다르듯이 관찰한 사람의 사유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변명을 하는 상황만 해도, 주의 깊은 사람에게는 타당한 이유를 들어 사유의 세계 속으로 안내한다.(76쪽) 마찬가지로 예술적인 행위는 창조적인 행위이며, 남이 하지 못하는 행위다.(104-105쪽) 그렇다고 해서 예술가가 자신만 아는 그림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이때 남이 하지 못한다는 말은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림을 완성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고, 무엇의 방해를 받아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설령 예술가가 그런 사정으로 작품을 미완성했다 하더라고 독자들은 작품의 여운으로 받아들이거나 불쾌감을 드러낼 것이다. 인간의 감관은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쪽으로는 불쾌하더라도 다른 한쪽으로는 만족스러울 수 있다.
고통과 쾌락은 이율배반적이다. 혐오하면서도 이끌린다. 쓴맛도, 허기를 달래는 데에는 유용할 때가 있듯이 말이다. 단맛으로만 인생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루함이나 권태에 인간은 잘 길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에게는 고집과 아집이 있어서 상대방이 강하게 주장을 해도 믿지 못할 때가 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감각은 다양하고 심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