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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미인, 혹은 아름다움으로 병든 사람/ 박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등록일 2018.11.06 / 작성자 송*원 / 조회수 151  

박준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읽으면 그의 말을 따라가게 된다. 독자가 시의 말을 따라 붙으려 할 때, 습관적 동화를 거부하기 위해 일부러 그 움직임이 힘들어지도록 말의 자연스러운 운행을 중지시키는 데 능숙한 시인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좀더 그 움직임이 수월하도록 부드러운 운행을 하는 시인도 있는데, 박준의 경우에는 후자에 가까운 듯 보인다. 가까워보인다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박준이 명백한 후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이상하게 부드럽다.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부드럽다. 따져 읽으면 시의 부분 부분에 혹은 장면과 장면 사이에 단절과 비약이 도사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읽을 때의 독자는 그냥 따라가게 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시의 언어가 지닌 어떤 속성을 독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모방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박준의 시에는 크기를 쉽게 잴 수 없는 커다란 수용력 같은 것이 있다. 그의 시는 받아들인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하지 않는가를 묻는 일은 어리석을 수도 있다. 대상이 불분명한 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고, 없는 대상까지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존재와 부재, 있음과 없음, 시인은 이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시인에게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무엇이 있는가. 고통이 있고 서러움이 있고 가난이 있다. 있어도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명징하게 있다. 이를테면 옷보다 못이, 그 못을 박았던 자국이 많은 벽면처럼 말이다(옷보다 못이 많았다). 또 유사한 감수성의 피를 나누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혈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듯한 인물들이 있다. 아버지는 홀로 울면서 자신의 슬픔을 숨기고 있고(파주), 어머니는 아이를 잃은 후에도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밥상을 차리고 있다(). 시 속의 나는 어떤가. 그는 앓고 있다. 미열에 들 떠 눈을 껌뻑거리며 이 모든 슬픔의 존재들을 서서히 사라지는 소멸의 감각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렇다. 그것들은 모두 없어지고 있다. 없어지면서도 있다, 이 미묘한 시차를 즐기는 시인의 모습이 시집 곳곳에 드러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없는가.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 대표적인 그 사람은 미인이다. 시집의 맨 마지막 장을 들추어보기 전에 기이하게 이 미인은 없는 사람일 거 같은 예감이 든다. 그녀와 함께 지내던 방에 대한 시인의 애착이 유달라서 만은 아니다. 시의 어딘가에서 못 견디겠는 그리움을 표출한 적도 없지만, 미인에게서는 전적으로 그리운 사람의 냄새가 난다. 그녀가 어슴푸레한 빛의 공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어슴푸레하다는 것은 희미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말과 다르다. 그것은 시의 언어가 그녀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향해 있다는 증거이다. 바슐라르는 공간의 시학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의 지난 고독들의 모든 공간들은, 우리들이 고독을 괴로워하고 고독을 즐기고 고독을 바라고 고독을 위태롭게 했던 그 공간들은, 우리들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의 존재가 그것들을 지우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다.” (가스통 바슐라르 저, 곽광수 옮김, 󰡔공간의 시학󰡕, 동문선, 85) 미인과 함께 했던 공간은 시인에게 지워지지 않은 채 그를 더욱더 고독하게 만든다. 철저히 혼자가 된 고립감은 단지 혼자 있을 때 체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게 해준 누군가가 부재한 상황에서 비롯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미인의 부재와 시인의 고독이 미인을 키운다. 그녀는 이 세상에 없는 채로 죽지 않고 성장한다. 아니다 시인 쪽에서 이야기를 하자. 미인은 현존하지는 않는데도 불구하고 시인에게 미세한 삶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미인의 없음이 오히려 시인을 세밀하게 기억하고 또 구체적으로 살도록 부추긴다. 지상에 거처를 잃은 미인이 살 수 있는 지면을 만들라고 시인을 자극한다.  

 

여름을 부르는 이름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한다/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여름에도라는 어사는 이상하게 그럼에도라고 읽힌다. 어떤 불충분한 조건 속에서 혹은 어떤 불가능성을 품은 상태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만들고, 허기진 몸을 달래고, 앓았다가도 다시 깨어나 살아가야 한다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가 지면에 올린 시의 정황들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어야만 하는 아픈 순간들이 태반이다. 시인은 아름다움에 병든 사람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저 아픈 정황들이야말로 아름다운 것들에 복받쳐 공명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시인이 자신의 시속으로 파고든 여타의 미인들과 함께 이 세계를 철저히 사랑한 기록의 흔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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