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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모순 / 심연으로부터
등록일 2018.08.31 /
작성자 정*준 /
조회수 170
영화 <아가씨>를 봤다면 이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내 인생을 망치러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고. 나의 숙희.”
쉽게 해석되지 않는 이 모호한 고백이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서로를 해치는 모순적인 감정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로 섞이기 때문이다. 파괴와 구원이 어찌 하나일 수 있는가. 나를 헤아려 칼을 쥔 이를 어떻게 품에 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우리는 안다.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그럴 수 있을 뿐 아니라 감정은 이 불가해한 경험과 감각을 은밀히 혹은 맹렬히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왜 이러는지 스스로 알 수 없지만, 그래도 행하는 일. 그래도 원하는 일. 몸과 마음을 바쳐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일. 어리석음이라고도 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타락이라고도 할 수 있는 선택, 그 대가로 지불한 망한 삶. 그것이 단지 소설과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들의 그야말로 허구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이야기는 현실 없이는 존재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안다. 그 말 안 되는 감각과 감정의 정체를. 원하고 원망한다. 밀고 당긴다. 뜨겁고 차갑다. 욕하는 입술로 사랑을 말하고 움켜쥔 주먹을 펴고 포옹을 한다. 인간의 이성은 위대하고 예민해서 모순을 기가막히게 찾아낸다. 논리적이지 않은 것. 불합리한 것. 불가능한 것. 말도 안 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일과 윤리적이지 않은 일을 직관적으로 발견해낼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인간의 감정은 또 모순을 잘 참아낸다. 모른 척 하고, 아닌 척 하고, 심지어 좋아하며, 원하며, 때로는 ‘아름답다’ 라고 고백한다. 이쯤되면 인간이야말로 가장 모순된 존재가 아닐까?
오스카 와일드가 감옥에서 동성의 연인 앨프리드 더글러스에게 쓴 편지를 묶은 책 <심연으로부터>는 인간의 여러 본질 중 하나인 모순을 가장 잘 보여주는 책이다. 뜨겁고 차가운 문장으로 써내려간 편지엔 욕하는 입술과 사랑의 키스가 한 곳에 녹아 있다. 끔찍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인간은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연인을 원망하고 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이 책보다 잘 설명해주는 책이 또 있을까.
그러니까 사랑. 그것은 도대체 뭘까?

1854년 10월 16일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저명한 외과의사 윌리엄 와일드와 시인이자 번역가인 제인 프란체스카 엘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오스카 와일드는 당대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작가였다. 극작가와 소설가, 동화작가와 평론가로서 명성을 얻기 전부터 세기말의 데카당스와 맞물린 유미주의의 주창자로 이름을 남겼다. 겨우 28세의 나이로 미국 전역과 캐나다로 1년간 순회강연을 하고 두 대륙 간의 유명 인사가 되기도 했다. 국왕 에드워드 7세가 된 웨일스 공이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고 싶다고 요청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나는 아직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지 못했다. 그와 친분이 없다는 것은, 내가 그만큼 알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오스카 와일드는 인정받는 작가 중의 작가였고 많은 이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셀럽 중의 셀럽이었다.
연인이 된 앨프리드 더글러스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오스카 와일드가 최고의 작품을 쏟아내던 여름이었다. 대표작이 된 장편소설『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문학·예술 평론집『의도들』단편집『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그 밖의 이야기들』과 동화집『석류나무 집』을 연이어 출간하고 파리에서『살로메』의 집필을 끝낸 해였다. 그로 인해 4년도 지나지 않아 오스카 와일드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더글러스는 치명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과격하고 충동적이며 낭비벽이 심하고 끊임없이 관심과 돈을 요구했다. 지친 오스카 와일드가 거리를 두려고 하면 수없이 전보를 보내며 자신을 만나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위협까지 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더글러스의 이 치명적인 매력에 번번이 굴복하고 만다.
결국 오스카 와일드는 당시 동성애가 금지된 법에 의해 재판을 받아 유죄를 받는다. 공교롭게도 증거로 채택된 것들은 연인 더글러스에 대한 감정을 절절하게 써내려간 편지였다.
“나의 소중한 소년이여, 그대의 소네트는 정말 사랑스럽구려. 붉은 장미꽃잎 같은 그대의 입술이 격렬한 입맞춤과 더불어 감미로운 노래를 위해서도 존재하다니 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더글러스가 오스카 와일드를 암시하고 쓴 시도 불리한 증거로 채택되었다.
“나는 감히 그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사랑이니”
오스카 와일드의 유죄 선고는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런던의 극장과 서점가에서는 오스카 와일드라는 이름과 그의 연극, 책 들이 자취를 감추었고 그가 다녔던 트리니티 칼리지의 우등생 명판에서도 그의 이름이 지워졌다. 런던 최고의 유명인사가 모두에게 배척당하고 버림받은 죄수로 전락한 것이다. 또한 그의 아내 콘스턴스는 두 아들을 데리고 독일로 떠났고 와일드라는 성을 홀랜드로 바꾸었다.
오스카 와일드는 금지된 사랑을 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
내 마음을 흔든 건 사랑에 투신한 비극적인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그 후에 오스카 와일드의 태도에 있다. 그는 형기가 5개월 남짓 남은 시점에서 연인에게 기나긴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모든 감정이 최고 에너지로 증폭되어 편지에 담겨 있다. 마치 뜨거운 바늘에 잉크를 묻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문신을 새기는 듯 하다. 연인을 향해 원망하고 비난한다. 관계를 일찌감치 끝내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처절하게 자책하기도 한다.
“당신은 이 편지를 끝까지 다 읽어야만 할 거야. 편지 속의 한마디 한마디가 생살을 태우는뜨거운 불이나 피를 흘리게 하는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느껴질지라도.”
“그 어디에서든 당신이 내 곁에 있던 동안 내 삶은 철저히 비생산적이고 비창조적이었지.”
“나는 당신을 진작 떼어냈어야 했어. 옷에 붙여서 몸을 찌르는 벌레를 떼어내듯 당신을 내삶에서 몰아냈어야 했던 거야.”
그의 고통과 증오가 너무도 생생하게 느껴져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런데 편지 사이 사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 연인에 대한 사랑과 그림움의 감정이 숯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의 몰락을 지켜보는 내 입장에서는 열불나고 답답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오스카 와일드의 사랑의 마음이고 감정이었다니 더 할 말은 없다. 그 문장을 눈으로 마음으로 따라 읽는데 왜 나는 그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걸까.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의 기억은 이곳에서 나와 함께 걸어다니는 그림자와도 같아. 나를 결코 떠나지 않으면서, 밤에도 나를 깨워 똑 같은 이야기를 하고 또 하지.(중략)우리가 함께 거닐었던 거리나 강가, 우리를 에워쌌던 벽이나 숲, 시곗바늘이 몇시를 가리켰는지, 바람의 날개가 어디로 향했는지 우리를 비추던 달의 모양과 색깔까지도.”
오스카 와일드는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으로부터 버려진 그 순간에도 오직 연인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주먹질을 하고 동시에 그가 가슴으로 안아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는 어리석고 우매한 바보멍청이다. 화가 나고 답답하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으면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고 그저 그를 연민하고 편을 들어주게 된다. 그의 사랑을. 그를 망하게 했을지라도 그의 선택을.
“사랑은 상상력을 먹고 자라지. 우리는 상상력에 의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현명해지고,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더 나아지고, 지금의 우리보다 더 고귀해질 수 있어.”
“오직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게 상상된 것만이 사랑을 살찌울 수 있는 거야.”
어쩌면 오스카 와일드가 <아가씨>를 봤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 인생을 구하러 온 나의 파괴자. 나의 더글러스.” 오스카 와일드만 그렇겠는가. 그곳에 단 1%라도 구원이 있다면 뛰어들고 보는 인간의 어리석음. 망하고, 망하는 걸 좋아하고. 아름다워하기까지 하는 게 인간이라니. 모순이다. 그래서 또 좋고. 또 멋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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